9회 초_제자리걸음이 계속되는 시간
봄이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돔에서 개막전을 열 수 있었다. 코로나19가 지구 한 바퀴를 도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그 영향으로 일본의 모든 공항은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그 영향으로 우리 팀뿐만 아니라 많은 팀의 외국인 선수들의 입국이 어려워졌다. 언제 정책이 바뀔지 모르는 혼란한 상황이 이어지며 어떤 팀이 외국인 선수를 문제없이 입국시키느냐가 팬들 사이에서 프런트의 능력이라고 이야기될 정도였다. 업무뿐만 아니라 개인 일상에서도 많은 것이 변했는데 가장 먼저 가게들의 영업 자숙이 이어지며 문을 닫는 음식점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외출 자체를 꺼려해 장사가 안 되는 것도 있겠지만 남에게 민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일본에서는 자숙이라는 표현으로 영업 혹은 외출을 삼가는 일상을 이어갔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사회의 민낯 혹은 양면성을 느꼈던 깜짝 놀란 이야기를 들었는데, 코로나19 감염이 증가하던 일본 내에 비상사태 선언이 내려지고 얼마 안 지난 시점에서 실장님 지인의 동네에서 감염자가 발생했다. 규슈라는 일본에서도 보수적인 그리고 시골 동네라서 코로나19에 대한 오해가 있어 생긴 일 일수도 있지만 감염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그 집 주변에 코로나 감염자가 살고 있다 라는 식의 표시를 하면서 차별을 넘어 괴롭힘을 했다며 실장님도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뉴스에서 이따금씩 영업 자숙을 하지 않는 식당에 행패를 부리거나 다른 지역의 자동차 넘버를 발견하면 해코지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서로 도와가도 모자랄 판에 더 큰 아픔을 주다니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한편으로는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끝도 보이지 않고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커다란 터널을 마주한 인류의 바닥을 본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 그 당시 한국과는 다르게 일본에서는 PCR 검사를 일반인이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받는다고 하더라도 몇 만 엔의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우리는 NPB 조직의 일원이자 회사차원의 선제적 대응으로 한 달에 한 번 전 직원이 항체검사 그리고 PCR 검사를 진행했는데, 혹여나 직원 중 누군가가 감염된다면 신문기사가 나는 것은 물론이고 돔에서 선수들과 동선이 완벽하게 분리된 것은 아니라 최악의 경우 리그 중단까지 영향을 줄 수 있기에 모두가 조심스레 숨죽여가며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해외마케팅이라는 본래의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실장님과 나는 후쿠오카와 일본 내의 외국 미디어 혹은 관련기관에 새롭게 오픈한 신빌딩의 홍보와 취재 대응에 힘을 쏟았다. 모두가 외출과 모이는 것을 자제하는 상황에서 회사가 오랜 시간 그리고 막대한 돈을 투자한 공간을 알리고 이곳에 와달라고 이야기를 하는 내가 참 모순적이었다. 여전히 돔에는 절반 이상의 손님을 받을 수 없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야 할 공간은 텅텅 비어 가끔 스산한 공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예년 같았으면 모두가 기쁘게 받아주었던 시합 초대권을 주는 나도 받는 지인도 미안한 마음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힘을 주었던 우리 팀과 돔 그리고 프로야구가 '이 시국에?'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니는 눈엣가시처럼 사람들에게 비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야구가 없어도 사람들은 살아갈 수 있었고 돔에서 모일 수 없는 사람들은 다른 차원의 공간에서 모임을 이어나갔다. 업무에 이어 우리 회사 그리고 업계에 대한 물음표가 끊임없이 생기던 시간이었다. 몇몇 선수들 역시 이렇게 힘든 시기에 개막해서 자신들이 경기를 하는 것이 이기적인 생각은 아닌가 하는 고민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힘든 상황이라 오히려 예전의 일상과도 같았던 야구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고 이야기해주시는 분들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도 텅텅 빈 돔을 보며 회사의 매출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끼리 북 치고 장구 치며 경기를 진행하더라도 경기를 포함해 돔의 구석구석에 즐겨주셨으면 하는 이야기들이 고객에게 전달되지 않음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그리고 지금껏 당연하게도 그걸 즐거워해 주셨던 분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원동력이었는지를 여실히 느꼈다. 몇 년 전, 일본시리즈 우승이 정해졌던 그날의 시합 전 콩코스의 분위기며 팬들의 모습에서 오늘 결정되겠구나 하는 기운을 강하게 느꼈던 적이 있다. 그만큼 팬들의 응원과 기운은 승리의 스타디움을 구성하는 마지막 조각과도 같다. 그 조각이 채워지지 않으니 허전한 건 당연한 것 일지도 몰랐다.
설날 즈음에 시작된 코로나19의 영향은 추석엔 집에 갈 수 있겠지 하는 바람을 무참히 밟아버렸고 그다음 해의 설날엔 갈 수 있겠지 했던 마음도 매정하게 베어버렸다. 좋아하는 야끼토리 집에서 동기들과 수다 떠는 일상도, 도쿄의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예전처럼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자주 가던 동네 카페는 경영난을 겪다 결국 문을 닫았고 나의 일상의 즐거움도 하나 둘 줄어들어갔다. 겸임으로 하게 된 새로운 부서의 업무는 크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깍두기인 상태로 일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문제만 일으키지 말자라는 방어적인 태도로 일을 하게 되었다. 일 벌이기 좋아하는 내가 점점 돔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