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말_돔에서 졸업하기
꽤 심한 번아웃을 겪고 퇴사를 생각하던 시기에 새로운 부서로 이동을 했던 나에게 코로나19는 모처럼 가득 찬 일할 의지도 에너지도 아이디어도 다 앗아가 버렸다. 코로나19가 전부는 아니었지만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조금 더 길어졌을 돔에서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타이밍이 왔다는 생각이 분명하게 들기 시작했다. 예전에 한국의 대기업을 퇴사하고 대학원 입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한 친구가 보낸 편지에 퇴사라는 결심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며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에 불현듯 떠오르는 그런 순간이었다고 적힌 구절이 생각이 났다. 나에게도 비슷한 순간이 찾아왔다. 무엇보다 나는 교환학생으로 그리고 대학원 유학생으로 일본에 왔을 때 이 나라에서 오래 살 생각이 없었기에 언젠가는 한국으로 갈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고 그저 때가 왔다고만 생각했다. 코로나19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갑자기 해고되는 이야기를 심상치 않게 들었고 회사가 비자 연장을 해주지 않아 귀국했던 지인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정규직 사원이라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이 회사에서 정년까지 일할 수 있었고 일본 영주권도 신청할 수 있을 만큼의 소득과 생활을 보장받고 있었다. 일본에서 생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안정적인 상태를 버리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투정이었을 수도 있다. 일본에 가족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홀로 외국생활을 오래 지속할 생각도 없었고 무엇보다 시간이 더 지나면 나 스스로가 안정된 일본에서의 생활을 등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과 일본의 친구들 모두 하나 둘 결혼을 하며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가족 구성원이 늘어날수록 자신의 의지로 앞으로의 생활을 바꾸는 것의 어려움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이곳에서의 생활기반이 더 단단해지기 전에 한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던 시기이기도 했다. 혼자만의 사요나라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새로운 회계연도이자 개막하는 3월 말을 졸업시점으로 정했다. 끝을 정하니 모든 일상이 소중해지기 시작했고 만나지 못한 얼굴들이 계속 떠올랐다. 그리고 졸업작품과 같은 마지막 프로젝트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에 조금 더 남아 작업을 하기도 했고 내가 없어도 문제가 없도록 최대한 모든 자료를 보기 좋게 남겨가며 하나 둘 준비를 시작했다.
별 감흥 없던 집 앞 공원에서 매일 저녁 산책을 핑계로 계절의 변화를 꾹꾹 담았고 푹푹 찌는 여름 날씨와 맑은 바다를 눈으로 가득 담았다. 날이 쌀쌀해지니 멋진 단풍을 보겠다는 핑계로 대학 교단에서 멋진 선생님이 된 선배와 후배를 만나러 교토에도 다녀왔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후쿠오카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순간도 맞았다. 회사 규정상 한 달 전에 퇴사를 이야기해도 괜찮았지만 우리 부서는 나 밖에 없기도 했고 신빌딩 프로젝트의 MD를 내가 다 맡게 되어 인수인계도 필요하기에 연말 혹은 연초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겨울을 맞았는데 갑자기 실장님이 출근을 안 하기 시작하셨다. 연말연시 휴가가 원래 길기도 하고 코로나19로 연차를 소진하지 않은 사람이 많아 빨리 쉬시는 건가 싶었는데 12월 중순에 쉬기 시작하셨던 실장님이 연내에는 출근하지 않을 거라며 본부장님이 필요한 사항은 본인에게 이야기하라고 알려주셨다. 실장님과는 개인적으로 라인으로 자주 연락을 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는데 갑자기 연락도 없으셔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몸이 안 좋아지셔서 입원을 하셨나? 코로나19로 우리 부서의 업무가 줄어 소문이 돌던 영업부서로 다시 복귀하시게 되어 그전에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시는 건가? 별의별 생각을 하며 조금은 심란한 상태로 새해를 맞이 했고 출근하기 하루 전인 일요일에 갑자기 실장님께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미안하다며 자신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며 집 근처 카페에서 차나 같이 하자는 말씀이셨다. 실장님이 드디어 다른 부서로 가시는 이야기를 하시려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나도 퇴사 이야기를 실장님께 제일 먼저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그게 오늘이다 싶었다.
이 회사에서 유일하게 닮고 싶다고 생각했던 멋진 상사였고 업무 이외의 부분도 많이 도와주시고 코로나19로 귀국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딸과 비슷한 나이의 나에게 마음도 많이 써주셨던 분이었다.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고 오랜만에 만난 실장님에게 예상했던 이야기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실장님의 퇴사였다. 심지어 이야기를 들은 바로 다음 주였다. 내 예상을 빗나간 것도 모자라 나보다 더 먼저 퇴사를 하신다는 게 큰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실장님께서는 나를 두고 가는 게 너무 마음이 쓰인다며 그래서 이야기를 어떻게 할지 고민이 많으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사실은...'으로 시작하는 퇴사 결심을 말씀드렸다. 내가 놀란만큼 실장님도 나의 퇴사 이야기에 놀라셨고 둘 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했었다는 것에 놀람과 동시에 역시 마지막까지 이심전심이라며 웃으며 자리를 나왔다. 실장님은 긴 고민 끝에 독립을 결심하셨고 마침 때가 왔다고 생각되어 움직임을 시작하고 계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나의 퇴사도 딱 좋은 타이밍이지 않을까 하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다음 날 출근으로 새해의 업무가 시작되었고 본부장님과 겸임이던 부서의 과장님께 부탁해 시간을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인생 첫 퇴사를 내 입으로 꺼냈다.
본부장님) M상이 이렇게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텐데 무서운 얘기는 아니겠지?
나) 무서운 얘기는 아니고 두 분께 상담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본부장님) 듣기 무서운데 무슨 얘기예요? 사실 나도 M상에게 할 얘기가 있는데.
(나에게 하시려던 이야기는 바로 실장님의 퇴사 이야기였다.)
나) 그게 사실은... 퇴사하려고요.
본부장님) 뭐? 진짜? 왜?
과장님) (한숨)
나) 퇴사는 여기로 이동하기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거고, 시기는 3월 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는 프로젝트는 마무리하고 제대로 인수인계하려고 준비도 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안 그래도 실장님도 퇴사하신 데에 이어 나까지 나간다고 하니 본부장님 입장에서는 막막했을 거다. 그 이후로 여러 질문을 받았고 나의 확고한 퇴사 의지를 확인하시고는 공은 인사부로 넘겨졌고 인사부장님께 연락이 와 다시 한번 면담을 진행했다. 나의 퇴사 이야기는 바로 임원진 회의에 보고되었고 임원진분들께서 많이 아쉬워하셨다며 귀국 후에 KBO 구단에서 일할 생각 있다면 M짱은 언제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라는 말도 전해주셨다. 무엇보다 한국에 나를 추천해주시겠다는 이야기가 기뻤다. 감사한 이야기는 말로만으로도 충분히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별도로 퇴직원을 작성해서 제출해달라고 해주셨는데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수기로 심지어 세로 쓰기로 쓰는 게 보통이라기에 한 다섯 번 정도 다시 쓰고 속이 비치지 않는 봉투에 넣어 제출했다. 그리고 남은 봉투는 귀국 전에 후배들과 동기들에게 나눠줬는데 얼마 전에 한 명이 그 봉투를 사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장님의 공석이 공식적으로 회사 내에 알려졌고 퇴사 전까지 나는 비공식 본부장 보좌역으로 우리 본부의 모든 일을 하나 둘 처리했고 좀처럼 정해지지 않는 내 후임을 기다렸다. 당시 나와 비슷한 연차와 능력을 가진 사원을 찾는 게 어려워 결국 급한 대로 파견사원이 들어오며 일을 하나 둘 넘기기 시작했고 관계기관에 인사를 돌다 보니 금방 마지막 출근날이 다가왔다. 마지막 출근날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는데 첫 출근했던 날도 비슷한 날씨였던 기억이 있어 시작과 끝이 같은 돔 생활이었구나 싶었다. 보통 마지막 출근날에는 다들 칼퇴 준비를 하고 인사를 돌곤 했던 것 같은데 내일이면 도와주고 싶어도 못 도와주기에 최대한 많이 처리하려고 노력했고 같은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동료에게 여러 번 불리며 잔업과 함께 마지막을 불태웠다. 그리고 찾아온 조금 창피한 꽃다발 수여식과 함께 드디어 돔을 나왔다. 눈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마지막 출근 후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업무와 별도의 행사로 돔에서 모두를 만날 일이 있었고 귀국 후에 e스포츠 프로젝트를 프리랜서 자격으로 돕기로 했기에 완전히 퇴사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마지막 출근 이후에 나의 분신과도 같았던 스포츠 펍에서 함께했던 동료들과 작별의 아쉬움과 고마움을 전했고 당분간 만날 수 없을 지인들을 만나러 도쿄에 오래 다녀오기도 했다. 첫 일본 생활을 시작했던 작은 다다미방의 아파트와 아르바이트했던 쇼핑몰, 그립지만 두 번 다시 하고 싶지는 않은 연구실 생활의 주 무대가 되었던 캠퍼스와 자취방, 즐겁고 슬픈 추억이 가득했던 도시의 곳곳에 나의 이십 대가 흩어져있었다. 당분간 만나기 힘든 친구들과의 시간은 기뻤지만 헤어짐에 익숙한 객지 사람에게도 힘들었던 조금 긴 이별은 아쉬움이 가득했다. 후쿠오카로 돌아와 남은 짐과 각종 수속을 마치며 동기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준비해준 졸업여행도 다녀왔는데 방송국에서 파견 온 동기와 홍보부 동기들의 엄청난 노력으로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나와 꽤 인연이 깊은 사람들의 릴레이 메시지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수면시간 3시간이라는 빡빡한 스케줄로 오랜만에 대학생처럼 놀고 마시며 진한 아쉬움의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19로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없어 매주 소규모 송별회를 하면서 아쉬움보다는 아는 사람 하나 없던 이곳에서 이렇게 헤어짐의 아쉬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진 것에 감사했다. 그만큼 나중에 후쿠오카에서 만날 사람이 많아졌다는 뜻이니 아쉬울 것 없는 일이었다.
코로나19로 한 시간에 하나 이상 있던 후쿠오카발 인천행 비행은 일주일에 두세 번으로 줄었고 몇 개월 전만 해도 아예 운행되지 않아 도쿄나 오사카 출발도 마음의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후쿠오카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다만 급변하는 상황으로 당초 예약했던 비행 편이 취소되었고 다행히도 며칠 뒤 출발하는 비행 편이 있어 무사히 예약을 변경했다. 짐을 다 빼고 부동산 회사와의 점검을 마치고 그 집에서 나오는데 지금까지 누군가가 그 집에서 나를 배웅한 적 없었는데 처음으로 누군가가 있는 내 집에서 내가 나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동안 들지 않았던 익숙했던 것들과의 작별이 실감 났다. 고맙게도 친구가 출국날 공항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해서 염치 불고하고 아침 일찍 휴대폰을 해지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코로나19 감염이 다시 심해지는 상황이라 동기들에게는 공항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영상통화라도 하자고 했는데 출국장에 가보니 동기 전원이 와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얼굴이 보여 놀랐고 수속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사진도 찍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애들이 무언가를 주섬주섬 펴더니 직접 손으로 그린 종이를 이어 붙인 현수막을 보여줬다. 공항까지 배웅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는데 바쁜 와중에 준비했을 생각에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거기에 비행기 안에서 심심할 테니 비행시간에 맞춘 영상까지 만들어줬는데 지난 졸업여행의 추억과 나에게 보내는 영상 메시지까지 안 그래도 촉촉해진 눈이 더 눈물로 차올랐다. 서툰 한글로 적은 내 이름이 적힌 마지막 편지에서는 모두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고 몇 년 전 함께 주고받았던 입사 후 1년 전 편지 생각도 났다. 기어코 동기들과 친구들은 내 눈물을 보고 날 출국장으로 보내주었다. 비행기 안에서 편지를 하나 둘 읽고 영상을 보면서 대한해협을 건넜고 울다 웃는 사이에 비행기는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처음엔 1년, 그리고 2년, 잠깐 왔다가는 시간 일 줄 알았던 나의 일본 생활도 드디어 막이 내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지난날의 점들이 이어져 여기까지 왔다. 오랜만의 한국생활은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이 옛날 일이 될 만큼 빠른 속도로 매일이 변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미래에 변화무쌍한 한국에서의 일상을 일본의 친구들과 함께 즐길 수 있길, 그리고 한국의 친구들과 내 지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