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날의 추억 속으로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일어나려다 싸늘한 공기에 놀라 이불속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연휴라서 늦으면 차 밀린다."
마지못해 일어나 부엌으로 가보니 벌써 남편은 과일과 커피를 준비해 피크닉 가방에 넣고 있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뒤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차가 막힐 거라는 예상과 달리 도로는 시원스럽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을 햇살이 차 안으로 들어와 기분 좋게 우리를 감싼다. 북한강을 끼고 한참을 달리다 좁은 길로 들어서자 코스모스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한 시간을 조금 넘게 달려 축령산 기슭에 있는 수목원에 도착했다. 수목원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가을은 국화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입구부터 국화향이 그윽하다. 우리는 관람 안내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걷던 오솔길에 피어 있던 구절초가 길 따라 하얗게 만발이다. 온통 그곳은 가을이 가을 속을 노닐고 있다
그런데 걷는 내내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날 따라다닌다. 여러 번왔던 익숙함도 가을이 주는 어떤 감흥도 아니다. 남편을 앞서가도 뒤를 따라가도 그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저만치 길을 따라 눈에 한옥이 들어왔다. 그때야 비로소 그 묘한 감정이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달빛정원과 하늘길 그리고 수목원 곳곳에서 나는 P 언니와 걸었던 추억을 만났던 것이다. 일순간 언니에 대한 그리움이 와락 달려든다.
P 언니는 독서와 글쓰기를 병행하는 문학 모임에서 만났다. 도시적인 외모와는 달리 말이 없고 수줍음을 타는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습관처럼 모임이 끝나고 나면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어쩌면 우리는 문학 공부보다는 그 시간을 기다릴 때가 더 많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언니는 문학 모임만 참석하고 말없이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P언니, 약속 없으면 우리랑 밥 먹고 가요. 내가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보내 줄 거예요"
하며 내가 언니를 잡아끌었다. 마지못해 따라오며 그럴까 한다. 모임에 나온 지 거의 두 달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어울려 밥도 먹고 공부도 하며 오래 같이 만나다 보니 서로 정이 들었다. 누구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모임을 제안했고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끼리 모임을 만들었다. 우리는 가끔 만나 차도 마시고 때로는 여행을 하며 사소한 일도 서운한 일도 서로 이해하면 5년을 넘게 모임을 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언니를 보냈고 준비 없는 이별을 했다. 항간에는 그 언니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이 떠돌았지만 모두 근거 없는 헛소문뿐이었다.
남편과 앞뒤가 탁 트인 한옥 대청마루에 앉았다.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다가온다. 남편이 준비해 온 커피를 내게 건넨다.
"아! P 언니 생각난다. 그날도 우리는 이 대청마루에 앉아 언니가 준비해 온 커피를 마셨는데, 언니는 말도 없이 왜 우리 모임을 떠났을까? 그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어."
느닷없는 질문에 남편이 " 글쎄,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한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니 우리가 너무 어설프게 언니를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우리와 여행을 다니면서도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 때도 언니의 표정이 그늘져 보일 때가 있었는데 무심히 넘겼다. 언니를 좀 더 이해하며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멀리 푸른 하늘 위로 솜털 같은 구름이 엷게 드리워져 있고 산 위로 가을이 출렁댄다. 그 누구도 예측키 어려웠던 지난했던 날들, 한없이 어설퍼 그래서 더 회한 이 남는 설익은 그 추억들이 가을 속을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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