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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Mar 11. 2021

꽃자리


봄 햇빛이 좋아 무작정 길을 나섰다. 길을 재촉하는 커다란 트럭을 먼저 보내고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지릿한 냄새가 풍긴다. 그런데 그 냄새가 왠지 낯설지 않다. 지릿한 듯 지릿하지 않고 향기로운 듯 정감이 가는 냄새다. 그렇다고 요즘 다투어 피고 있는 꽃들한테서 나는 향기는 더더구나 아니다.

냄새를 따라 조그마한 길섶으로 들어서니 눈앞에 하얀 구름바다가 확 펼쳐진다. 냄새의 주인공은 바로 배꽃이었다. 야트막한 산자락을 타고 배꽃이 한창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배꽃을 본 것이 얼마만인가. 적당히 부푼 하얀 솜사탕처럼 군데군데 피어 있다. 배나무 밑에는 갓 돋아난 풀과 별들을 흩뿌려 놓은 듯 피어 있는 냉이 꽃이 어울려 자못 신비롭다.


그런데 대부분의 농원은 외부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철조망이 쳐져 있는데, 이곳은 봄바람 머물고 내가 머물고 나비가 머물도록 허락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배 밭 안으로 들어서니, 이랑 사이사이마다 거름 포대가 놓여 있고 잘 정돈된 배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유독 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배나무마다 걸려 있는 조그마한 메모판이다. 메모에는 서로 다른 글귀와 이름이 적혀 있다. “이쁜아, 사랑한다.”는 글귀가 있는가 하면, “튼튼하게 자라줘서 고맙다.”는 글귀도 걸려 있다. 농장 구석구석 주인의 정성과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순간 이곳이 개인이 경영하는 농원이 아니라 주말 농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락도 없이 들어온 터라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가 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배꽃과 이야기를 나누며 수정을 하고 계셨다. 정성스럽게 붓질을 하는 할아버지의 손놀림에 따라 사월의 태양을 머금고 배꽃이 벙실벙실 웃는다.

한참을 보고 있어도, 낯선 이의 인기척은 아랑곳하지 않으셨던 할아버지가 안경 너머로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오랜 세월을 같이 하다 보니 이젠 습관이 되어 버렸어. 이젠 이 녀석들도 내 이야기를 알아듣는 모양인지 잎사귀를 살랑살랑 흔들기도 하고 햇살이 좋은 날에는 까르르 웃기도 하거든. 그런 모습을 보면 덩달아 나까지 기분이 좋아져. 나는 이곳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해.”

하시며 한 번 해보라고 붓을 건넨다. 사다리에 올라서니 잘 자란 배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종대로 횡대로 대열을 이루며 줄을 맞춰선 그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저들은 분명 할아버지가 베푼 정성과 사랑만큼 향기로운 열매로 보답하리라. 이곳이 할아버지에게는 평생을 바쳐 가꾼, 가장 행복한 꽃자리가 아닐까.


수정하는 일도 잊고 그 광경을 보고 있는데 며칠 전 작은아이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작은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외할아버지와 함께 집에 있는데 너무 심심해서 놀이터에 나가 놀고 싶다며 졸랐다고 한다. 위험하니까 엄마가 돌아오면 같이 나가라고 할아버지는 말렸으나 그래도 계속 조르자, 마지못해 허락하셨던 모양이다. 모처럼 밖에 나간 아이는 노는 데 신이 나서 볼일이 급했으나, 집에 들어가면 다시 못 나올 것 같아 참고 놀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르자,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갔는데…. 그러나 문을 여는데 서툰 할아버지는 당황해서 허둥거렸고, 그사이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할아버지는 엉엉 우는 손녀를 달래며 아무 말없이 오물을 치우고 목욕까지 시켜 주셨다고 한다. 얼마나 밖에서 놀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이제는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 놀 수 없을 만큼 어엿한 숙녀가 되어 버린 아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내내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했다.


그런데 그 일을 끝까지 숨기신 아버지한테 마음이 더 갔다. 그 당시 나는 육아와 직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때였고, 그동안 유치원에서 다쳐 이마를 꿰매는 사고와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었던 터라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욕심인지 몰라도 내가 즐기고 좋아하는 일을 선뜻 그만두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그런 내 모습을 여러 번 보아온 터라, 행여 이사실을 내가 알면 의사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칠 까 봐 숨기셨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딸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켜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딸이 좋아하며 꿈을 펼칠 수 있는 일자리, 그 꽃자리를 말이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행복한 삶을 꿈꾸며 행복의 조건을 내세우고 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거창한 일은 아니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딸을 좋아하셨고, 여자도 기회만 되면 일을 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던 아버지. 지하에서 보고 계실까, 당신이 지켜 주고 싶었던 그 자리에서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딸을….


온화하게 내리는 사월의 햇빛이 농원에 가득하다. 그 햇살 따라 하얀 배꽃이 배시시 웃는다. 가을이면 할아버지가 가꾼 이 행복한 일터에 튼실한 배들이 저마다의 향기를 품고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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