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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Mar 24. 2021

주방에는 지금

며칠 전부터 밥솥이 이상한 징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밥이 거의 다 될 무렵이면 '푸우'하고 힘차게 김을 내뿜던 밥솥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맥을 못추고 '피식피식' 소리를 냈고, 밥 물을 조금 많게 하면 죽밥이요, 조금 덜하면  푸석푸석거려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가끔은 기가 막히게 난질 난질하면서도 입에 착착 달라붙는 밥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산지 2년 조금 넘었는데 이게 뭐람. 당장 바꿔야겠어. 가격 때문에 할 수없이 샀는데, 이 브랜드를 사는 것이 아니었어."

내가 볼멘소리로 불평을 쏟아내자 남편은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검색을 하더니 밥 솥이 청소가 잘 안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며 청소가 답이라는 듯이 청소하는 기능을 연거푸 작동시킨다.


하지만 얼마 전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본 빨간 색상에 동글동글한 예쁜 밥솥을 떠올리며 '아무리 그렇게 해봐야 소용없을걸, 이 짠돌아' 하며 내심 작동이 안 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러나 밥솥은 그 뒷날 아침, 이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둣 그의  바람대로 쫄깃거리면서 맛있는 밥을 해 놓았지만 사흘이 채 못 갔다. 밥솥은 여전히 제멋대로 밥을 지었고, 남편도 거의 자포자기가 되어 항복을 하는 듯 보였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 A/s 센터 갔다 올게. 같이 갈래."

주말 아침, 남편은 밥솥을 껴안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현관문을 나서다 말고 내게 묻는다. 전날 달콤했던 환상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왠지 혼자 보내면 안 될 것 같아 따라나섰다. 


그런데 서비스센터는 주말 이른 아침이라 한산할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밥솥 안에 넣는 내솥이 망가져서 온 사람, 손잡이가 끊어져 온 사람, 고무 바킹 기능이 다해서 온 사람, 다른 한쪽에서는 밥솥을 고치는 비용이 너무 비싸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아내에게 전화로 물어본 사람 등 다양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 사기보다는 되도록이면 고쳐 쓰고 있었다. 한동안  서비스센터의 신기하고도 다양한 풍경을 넋 놓고 바라봤다. 


"오늘 A/s센터에 와 보니 나처럼 불쌍한 남편들이 많네. 부인들은 다 어딜 가고 남편들이 죄다 밥솥을 들고 왔어. 참 웃기지."

"어어, 말은 똑바로 하시지. 당신은 혼자가 아니잖아. 그리고 요즘은 남편들도 아내를 위해 가사를  많이 돕더라. 고루한 옛날 사고방식은 버리시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서비스센터 직원이 다 고쳤다면 우리를 부른다. 밥을 하는 센서가 고장이 났는데 그 센서는 2~3년에 한 번씩은 갈아 줘야 하는 소모품이라고 했다. 남편은 활짝 웃으며 개선장군이나 된 것처럼 밥솥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밥솥은 고무 바킹만 갈아주면 다른 거 신경 안 써도 구수한 밥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큰 착각이었다. 자동차가 잘 굴러가기 위해 엔진 오일은 물론 모든 기능 등을 수시로 점검해야 하듯 밥솥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나는 밥솥은 소모품으로 망가지면 버리면 된다는 얄팍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관리비 고지서에 나온 환경세를 보고 뜻밖이라는 둣 놀랜 것도 나였으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지금 밥솥은 젊은 나이에 러시아 혁명에 뛰어들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다 기사회생한 도스토옙스키라도 된 양 보무도 당당하게 주방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는 고물로 처리하려고 했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오늘도 어김없이 " 맛있는 밥이 완성됐습니다. 잘 섞어서 보온해 주십시오."한다. 뚜껑을 열고 김이 나는 따끈한 밥 한 공기를 가득 담아낸다. 


"거봐, 고쳐서 쓰기를 잘했지. 새것만이 능사가 아니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편이 히죽 웃는다. 남편 등 뒤로 아침 햇살이 곱게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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