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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Apr 28. 2021

잠시 흔들려도 괜찮아


딸이 독립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이제는 서서히 믿고 내버려 둘 때도 됐지만 도통 불안해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엄마 나 늦잠 잤어 어떡해, 방에 불을 안 끄고 나왔네. 그야말로 아직도 좌충우돌이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저녁이면  문단속은 잘했는지, 식사시간이 되면 밥은 먹었는지 문자로 묻는 걱정쟁이가 되어버렸다. 오늘도 나는 그런 딸이 못 미더워 오피스텔로 향한다. 남편은 일단 독립을 시켰으면 눈감고 모른 척하라고 충고하지만 엄마인 나는 그럴 수가 없다.


그런데 딸의 오피스텔  문을 연 순간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여기저기 벗어놓은 옷은 말할 것도 없고 화장대 위에는 화장품이 여기 저가 널브러져 있다. 그야말로 말괄량이 삐삐의 뒤죽박죽 별장은 저리 가라다. 빡빡한 병원 일정을 소화하느라 얼마나 바빴으면 하는 생각이 들다가 그래도 이것은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야야! 막내야, 자식들 독립시키면 내 시간이 엄청  많이 남을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더라. 자유보다는 또 하나의 구속이  기다리고 있더라. 너는 나처럼 일일이 신경 쓰며 살지 말고 독립시킨  순간 눈 딱 감고 그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말고 살아라"했던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고도 모른 척할 수가 없어 창문을 활짝 열고 청소를 시작했다. 상쾌한 봄바람이 쾌쾌한 냄새를 몰아낸다. 한참을 치우고 나니 방안이 제법 그럴싸해졌다. 그제야 방안의 풍경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시선이 출입문에 머물자 픽하고 웃음이 나왔다. 얼마 전 남편이 공들여 달아 놓은  잠근 장치가 이중 삼중으로 떡 버티며 지키고 있다. 건장한 남자 서너 명을 배치해놓은 듯 든든하다.


그런데  화장대 위에 전에 없던 묘하게 생긴 낯선 메모지 판이 세워져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4월 0일 00 할머니, 묽은 대변 2회,  심한 기침은 서너 번 정도. 소변 색 갈색이고 약간 거품이 있음, 딸 2명, 아드님이 1명(이 할머니는 아드님이 오는 것을 제일 좋아하심, 오늘은  아드님이 다녀가자 밥을 반공기나 드셨다).


4월 00일 오늘은 너무나 슬프다. 내가 처음 맡은 환자분이셨는데 내 정성과 보살핌이 부족했나 할아버지가 결국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분의 병상은 어느새 다른 환자분이 들어왔다.


 4월 00일 00 씨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그렇게 좋아하던 TV도 시야가 흐려져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어 안타깝다. 아침에 출근해  00 씨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더니 상태가 더 안 좋아져 중환자실로 옮겼다고 했다. 암은 언제 완전히 정복될는지  인간의 한계가 느껴진다." 등 환자에 대한 세세한 기록뿐만 아니라 초보 의사로서 환자를 살리지 못하고 보내야 하는 상실감 같은 것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메모판을 보고 있으려니 오랫동안 병원에 계시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병상에서 병마와 싸우고계신 분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고 시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천방지축인 딸이 의사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해졌다.


"집이 돼지우리에서 완전히 사람 사는 집으로 변했네.  엄마, 미안하고 고마워. 담부터 엄마가 걱정 안 하게 잘 치우고 살게요"

저녁 9시쯤 이제야 퇴근해서 왔다며 활짝 웃는 이모티콘과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리고 아직은 일이 많이 서툴러 힘은 들지만 보람도 있고 재미있다며 너무 걱정 말라는 문자도 보내왔다. 


하지만 24시간 당직은 물론이거니와 조금도 쉴틈을 주지 않고 수없이 걸려오는 전화, 고달픈 수련의 생활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자신 때문에 늘 노심초사하는 엄마를 생각하는 딸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아파왔다. 


"딸, 힘들지. 엄마가 응원할게. 힘내라"는  문자를 보내자, 띵동 하고 엄마 사랑해라는 문자가 온다.

내일은 딸이 좋아하는 해물 카레를 만들어서 가져가 냉장고에 넣어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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