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와 그녀
어제의 숙취가 조금 남아있는 채로 대니얼은 몸을 일으켰다. 퇴마학원에 들어오기 전 대니얼이 혼자 살던 집은 처분했기 때문에 지금 대니얼은 학원의 빈 강의실 하나를 숙소 삼아 쓰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루카스에게 붙잡혀 술상대를 해주어야 했던 것이다. 지난밤 루카스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열을 올리며 했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루카스는 여러 가지로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 같았다.
클레어의 말대로 강의실에서는 자유자재로 설정술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편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씻고 뜨거운 커피로 해장을 했다.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서 원장실로 향했다. 원장실 안의 제임스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오, 일찍 일어났네? 하하, 자네도 해장할 텐가?"
대니얼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제임스는 멋쩍은 표정으로 컵라면을 마저 먹었다. 마저 먹는 동안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나 말이 많아지는 것일까. 어젯밤의 루카스만큼이나 오늘 아침의 제임스도 말이 많았다. 제임스가 컵라면을 다 비우고 외출할 채비를 마칠 때까지 대니얼은 원장실 안에서 기다렸다. 보통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바지런을 떠는 법인데 어째 여기는 반대다.
"자, 가지."
30분쯤 지나자 드디어 준비를 마친 제임스가 대니얼을 불렀다.
"어디로 가는 거죠?"
"자네를 정식 등록시키러 본부에 가는 거야."
"본부는 어디에 있는데요?"
질문은 받은 제임스는 어떻게 설명을 할까 잠시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가 보면 알아."라고 말한 뒤 학원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대니얼은 어쩔 수 없이 제임스를 따라 건물 1층으로 내려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소형 승용차 한 대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보조석 창문 유리가 '지잉'하고 내려가더니 운전석에서 제임스의 얼굴이 이쪽을 바라보며 타라고 했다. '기왕이면 좀 좋은 차로 가면 안 되나?'라고 생각하며 대니얼은 보조석 문을 열고 차에 탔다. 차에 탄 대니얼은 깜짝 놀랐다. 밖에서 보았던 차와는 달리 차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럭셔리했다. 최첨단 계기판과 HUD, 고급진 대시보드와 가죽시트, 게다가 실내 공간도 대형 SUV 차량의 실내만큼 넓었다.
"이제 자네도 점점 적응될 거야."
놀란 눈의 대니얼에게 씩 웃어 보이며 제임스가 말했다. 차는 동부간선도로로 들어서 달리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운전을 하던 제임스는 한 손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대니얼은 인상을 찌푸렸다.
"차 안에서 피우실 거면 창문이라도 좀 여시죠."
"응, 그럴 참이었어."
제임스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선루프를 열었다. 제임스가 내뿜은 담배연기가 차 안 천장에 열린 선루프를 통해 밖으로 흘러나갔다. 제임스는 담배를 피우고 운전을 하면서도 대니얼에게 계속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대니얼은 일일이 대꾸하고 상대해 주느라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두 시간 가까이 달려온 곳은 경기도 연천이었다. 제임스가 3층짜리 상가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건물로 들어서 2층에 있는 '중앙소방설비' 사무실로 문 앞에 섰다. 제임스가 지문을 인식시켜 출입문을 열었다. 대니얼은 제임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또 한 번 놀랐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허름한 상가 건물의 한 층 정도로 기껏해야 130평방미터 되어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축구장 면적 정도로 넓고 층고도 말도 안 되게 높았다. 드넓은 이 공간 안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책상을 놓고 일하고 있는 모습이 유리문 너머로 보였다. 유리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커다란 카운터였다. 마치 건강검진센터의 접수창구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제임스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 접수창구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주었다. 제임스에게 흰 봉투를 받아 들은 직원은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젊은 남성이었는데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서류를 꺼내어 살펴보고는 말없이 단말기를 두들겼다. 잠시 후 접수창구의 남성은 끈이 달린 출입 패스 2개를 카운터 너머로 건넸다. "대니얼 씨는 노란색 패스를 착용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목에 거는 동작을 손으로 해 보였다. 제임스에게 주어진 패스는 파란색이었다. 직원이 버튼을 누르자 닫혀 있던 유리문이 스르륵 열렸다.
"잘하고 와. 난 여기서 기다릴게."
'방문객 라운지'라고 쓰인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제임스가 말했다. "네"라고 짧게 말한 뒤 대니얼은 노란 패스를 출입문 옆 개폐기에 태그 했다. 흰 타일로 된 바닥에 희고 밝은 조명으로 가득한 공간으로 들어섰다. 축구장만큼이나 널찍한 공간에 띄엄띄엄 책상이 놓여 있고 책상에는 각기 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대니얼은 1번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에 부착되어 있는 RFID 태그기에 패스를 태그 했다. 1번 책상의 직원은 대니얼의 혈압을 재고, 채혈을 했다. 그리고는 "2번 데스크로 가세요."라고 사무적으로 안내했다. 2번 책상은 대니얼의 지문을 채취하고, 동공, 정맥 등을 사진을 찍었다. 3번 데스크에서는 전신사진을 찍었다. 사진이라고 하지만 이른바 머그샷이라는 것이었다. 키를 표시하는 선과 센티미터가 그려진 보드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범죄자도 아닌데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심지어 폴리그래프(거짓말 탐지기), 뇌파측정 같은 것들도 했다. 그런 식으로 마치 건강검진센터의 검진 프로세스처럼 돌아다녀야 했다. 한 명의 퇴마사를 양성해 내기 위해 철저한 스크리닝을 거치는 것이다. 단지 스크리닝을 통해 걸러내는 의미뿐만 아니라 퇴마사의 신체정보를 데이터화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임무 수행 중에 피해를 입어 사망, 실종, 또는 전향하는 등 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검사를 마친 대니얼은 취조실과도 같은 방에 혼자 앉아 대기했다. 그 방의 한쪽 면에서는 커다란 거울이 달려 있었다. 방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지만 저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직미러. 방안 테이블에는 원격회의용 스피커가 놓여 있었고 그 스피커에서는 대니얼의 신원과 과거 행적, 인간관계 등에 대한 질문을 했다. 대답하지 못할 질문 같은 건 없었지만 왠지 이들이 대니얼의 신원조회까지 철저하게 했다는 느낌만큼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질문이 모두 끝나자 대니얼은 밖으로 안내를 받았다. 아까 제임스와 헤어졌던 곳으로 나와 '방문객 라운지'로 표시된 문을 열어 보았다. 쾌적해 보이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발을 앞쪽 티테이블에 올린 채 잠을 자고 있는 제임스가 보였다. 심지어 그는 심하게 코를 골고 있었다. 대니얼은 쓴웃음을 피식 웃고는 들어가 제임스를 깨웠다. 제임스는 입 주위의 침을 닦으며 일어났다.
제임스와 함께 접수창구가 있던 입구 쪽으로 나가려던 찰나에 이쪽으로 들어오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정장 차림의 여성은 도회적인 이미지에 안경을 썼다. 그 뒤를 젊은 남녀가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요, 제임스."
"음. 오랜만이네."
어째 제임스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지금까지의 흐리멍덩하고 좋은 아저씨 같은 푸근함은 찾아볼 수 없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제임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녀는 시선을 대니얼에게 돌리며 물었다.
"이쪽 분은 누구?"
대니얼이 자기소개를 하려고 입을 떼기도 전에 제임스가 말했다.
"이번에 우리 지부에 새로 들어온 친구야."
"오호. 그래요? 핸섬하네. 반가워요. 줄리아예요. 퇴마단 수도권과 강원충청 지역본부장이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
줄리아는 대니얼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목소리에는 거만함이 가득하고 눈빛에는 표독스러움이 가득했다. 대니얼은 그녀가 내민 손을 잡으며 악수에 응했다. 잡은 손을 놓은 건 옆에 있던 제임스가 "그만 가자고."라며 대니얼의 어깨를 치며 데리고 나가려던 때였다. 건물 밖으로 나와 다시 차에 올랐다. 어느새 제임스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었다.
"저 여자는 누구예요? 원장님이 아는 분인가요?"
"응. 알지. 아주 지독한 년이야."
이렇게 말한 제임스는 차를 출발시켰다. 돌아오는 내내 제임스는 말이 없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