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가르칠 창작 동요를 찾다가 '동요소녀TV'라는 유튜브 채널을 발견했다. 그 채널에는 어린이 합창단이 깔끔한 스튜디오에서 합창단복을 갖춰 입고 율동 하는 동영상들이 있었다. 이 채널에서 '동요 율동 뮤직비디오'라고 불리는 동영상들이다. 어린이집에서 시작 된 동요소녀 열풍은 어린이들, 동료 교사들 순서대로 퍼져나가 3살반부터 7살반까지 동요소녀의 영상을 보지 못한 아이가 없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영상 속 또래들이 프로페셔널하게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에 푹 빠졌다. 나중엔 대형을 맞추고 역할을 정해 율동을 따라 하기까지 했다.
동영상은 가끔씩만 틀어주는데도 얼마나 유심히 보았는지 7살 아이들은 동영상 시작 타이틀만 보고도 '나 조정빈!', '그럼 난 장우서!' 하며 역할을 정한다. (조정빈과 장우서는 주로 센터에서 율동을 하는 단원이다) 교사들도 각자 제일 눈길이 가는 단원이 있어서 저들끼리 '나는 얘가 제일 귀여워', '얘는 율동을 정말 잘해' 하며 즐겁게 율동을 따라하는 편이다.
이렇게 볼때마다 즐거워지는 동요소녀TV 동영상이지만 그 날 업로드 된 동영상은 조금 달랐다. '하하호호 떡볶이집'이라는 동요의 율동 뮤직비디오였다. 떡볶이라는 주제에 맞춘건지 아이들은 따뜻한 톤의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평소처럼 상큼한 미소로 율동을 시작했다. 가사는 학교 끝나고 떡볶이집에서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었는데 너무 매웠다는 귀여운 내용이었는데 끝부분에 '어른이 된다 해도 잊을 수 없을 거야'라는 가사가 나왔다. 그 소절을 들은 순간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잊은 줄 알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어린 날의 기억들이다.
당시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며 하루에 12시간씩 일했기에 부모님과 함께 동네가 나를 키웠다고 해도 옳았다. 그때 살았던 작은 동네에는 '주전 분식'이라는 이름의 분식집이 있었는데 종이컵 떡볶이는 500원, 슬러쉬 컵 떡볶이는 1,000원이었다. 친구와 함께 한 손에 한 컵씩 떡볶이를 들고 집과 놀이터,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다. 어떤 친구는 '파 많이 주세요.', 어떤 친구는 '어묵 많이 주세요.'라고 했었고, 나는 꼭 '저는 떡만 주세요!'라고 외치곤 했다. 주전분식 떡볶이는 하루종일 끓인 건지 떡이 갈라질 정도로 퉁퉁 불어있었는데 어린이들이 작은 치아, 작은 입으로 냠냠 먹기에 딱 알맞았다. 친구들이랑 먹을 때는 접시에 쉴 새 없이 포크들이 오갔었는데 엄마와 먹을 때는 엄마가 거의 손을 대지 않아 나 혼자 다 먹을 수 있었다. 엄마 입맛에 떡볶이가 너무 달았던 건지 나에게 많이 먹여주고 싶어 참으신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지금도 엄마와 함께 무얼 먹을 때면 항상 적게 드신다.
유년기를 지나 내가 교복을 입게 되었을 때쯤 주전분식은 문을 닫았다. 그 뒤 가게 자리에는 오토바이 가게가 들어서고, 더 나중에는 도시녹화 사업으로 건물이 부서지고 작은 풀밭이 되었다. 지금은 가게가 있었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곳의 떡볶이를 다시 한번 맛보고 싶었다. 나는 떡볶이를 끓이고 끓여 퉁퉁 불게 만들어 보기도 하고, 그 시절 아주머니가 하셨던 것처럼 물엿을 쏟아 부어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도무지 그때의 떡볶이 맛은 재현할 수 없었다. 주전분식이 다시 세워지고 주전분식 아주머니가 떡볶이를 만드셔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건 최근에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것은 퉁퉁 불은 달콤한 떡볶이가 아니라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모여 수다 떨던 그 시절, 엄마가 은근슬쩍 내 쪽으로 떡볶이 접시를 밀어주었을 때 마냥 즐겁게 떡볶이를 다 먹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이다. 건강하셨던 주전분식 아주머니와 봄봄 비디오 아저씨, 부영 슈퍼 할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