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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메디아 Sep 09. 2022

교육은 홀로서기를 향한다

「나의 해방일지」 리뷰 (1)

「나의 아저씨」가 2018년에 막을 내리고, 박해영 작가의 후속작인 「나의 해방일지」가 4년 만인 2022년에 방영되었다. 나는 「나의 아저씨」를 통해 교육 그 자체가 삶이며, 정글 같은 사회 속에서 서로 교육하고 교육될 수 있는 타인과의 인간적인 관계 맺음이 낳는 시너지 효과에 대해 강조한 바 있다. 이는 교육이 꼭 학교에서만 제공되는 서비스의 개념이라는 협의를 넘어서 좀 더 넓은 관점으로 받아들여지기 바랐던 나의 소망이 반영된 결과였다.


즉, 「나의 아저씨」가 교육의 개념에 대한 확장을 위한 것이었다면, 나는 「나의 해방일지」를 통해 교육의 기능, 역할, 혹은 목적의 확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교육이 삶 그 자체인 것은 알겠다. 그런데 역으로, 삶은 왜 교육으로 점철되어야 하는가? 일단 나는 내 허가 없이 부모의 판단 하에 이 세계에 얼떨결에 놓여졌다. 삶은 나에게 주어진(given)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굳이, 나의 삶에 또 다시 교육이라는 귀찮은 것을 부여하려 하는가.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캐주얼하게 논의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학습자로 하여금 '홀로서기'를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이는 어려운 말로 자율성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독립성이 될 수도 있다. 파고들면 세세한 의미가 달라지겠으나, 결과적으로 혼자 알아서 일어설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같다.


교육학개론이나 교육철학과 같은 각론에서는 교육의 목적을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으로 분류한다. 내재적 목적은 위에서 언급한 자율성 및 합리성 제고, 인격 도야 등과 같이 학습자 본인이 어떠한 수단을 통해 '교육됨'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반면에, 외재적 목적은 '교육'을 수단으로 하여 학습자가 사회에서 어떻게 잘 쓰이고 국가에 어떻게 이바지하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 국민교육헌장(1968. 12. 5.)


일반적으로 국가가 산업화 및 표준화되는 단계에서는 교육도 이 추세를 피할 수 없기에, 외재적 목적이 좀 더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1960~70년대 교육을 보면 획일화된 공교육을 통해 제각기 다른 애들을 '표준형 인간'으로 만들어 국가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주력하는 양상을 나타냈다. 다만, 산업화 이후 민주화를 거치면서 획일화 및 표준화가 아닌 다원화 및 개별화가 교육에서 중요해졌고, 학생 개인의 다양한 경험, 비판적 사고 및 문제 해결능력, 인격 도야 등이 훨씬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되었다.


사실은, 당장 사회가 경제발전해야하고 돈이 가장 중요해지면,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가치에 대한 멸시가 자연히 뒤따른다. 그리스 철학도 돈 걱정 없는 '시민'들의 전유물이었지, 노예들은 일하느라 바빠서 생각할 겨를도 없지 않았나.


그렇다면 경제발전 등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이 어느 정도 통제된 상황에서, 정말 그런 걱정을 덜 해도 되는 상황이라면, 교육 자체만 놓고 본다면 위에서 언급한 내재적 목적을 향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타당하지 않을까.


나는 그 내재적 목적을 모두 아우르는 키워드가 '홀로서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수학 과목을 교육하는 것은 학습자가 교수자의 수학 교육과정을 자기 자신에게 인풋하여, 궁극적으로는 교수자 없이도 학습자 스스로 수학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수학뿐만이 아니다. 어떤 것이든, 교육은 결국에 얘 알아서 잘 하게끔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이 지점에서 다시 돌아가보자. 나는 교육이 삶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지금, 교육의 목적이 홀로서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조금은 허술하지만 나는 지금 삶의 목적이 홀로서기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유시민 작가가 예전에 20대에게 '독립을 준비'하라고 조언했던 것이 더욱 더 기억에 남는다. 경제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단독자로서의 개인이 된다는 것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홀로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른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홀로서기를 지향할 책임이 있다. 이것이 미성년자와 성년자의 차이다. 이는 육체의 성숙도에 따라 가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술, 담배 등이 미성년자에게는 제한되어 있으나 성년자에게는 오픈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미성년자에게는 아직 보건/건강적으로 '홀로서기'를 할 준비가 안 되어있다고 판단해서이다. 반면, 성년자에게는 보건/건강적으로 '홀로서기'를 할 자격과 책임이 있다. 만약에 성년자 본인이 술, 담배에 중독이 되어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성년자 본인의 책임이 된다.


참으로 가혹하지 않은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그것은 나의 책임이 되는 것이라니. 내가 부모의 합의를 통해 이 세상에 떨렁 놓여진 것과 같이, 그저 시간이 나를 어른으로 만든 것뿐인데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이 필요하다. 이 세계에 즐비한 수많은 요소요소들과 마주하면서 나는 꾸준히 교육적 의사소통을 이어가야 한다. 이를 통해 나의 '성년자'로서의 홀로서기를 지향하고, 의사결정의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함과 동시에 이에 따른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드라마가 최근에는 「나의 해방일지」였다. 이 드라마를 활용하여 상기 내용을 심화해보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의 해방일지」의 주인공 3명은 남매로, 경기도에 살고 있다. 매일 같이 경기도 본가에서 아침 일찍 출근한다.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부모님과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한다. 그들을 홀로서기를 한 어른이라고 볼 수 있을까? 효자일 순 있다. 하지만 어른 같진 않다. 뭔가 미성숙해보인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경기도는 그러한 어른의 미성숙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본인 돈으로 차를 사는 것조차 부모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 홀로서기를 하지 못한 어른들의 공간인 것이다.


도와달라는 것은 아니다. 허락만 해 달라. 저 차 사려고요.
- 「나의 해방일지」 1화



실제로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이를 경기도에 대한 비하로 보면 다소 곤란하다. 비유적 공간이다. 실제로 시청자들 중에 서울과 대비되는 경기도라는 소재와 관련해서 불만을 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극 예술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 같다. 경기도에 서식하지만 서울에 있는 직장을 다니는 것은 곧, 어른으로서 '성년자의 독립성'을 상징하는 노동을 하면서도 부모에게서는 독립하지 못한 등장 인물들의 모순적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다.


나는 앞으로 이들이 어떻게 '교육되어' 교육의 목적인 '홀로서기'(「나의 해방일지」에서는 '해방'이라고 표현된다)를 달성해나가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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