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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 연습 Sep 27. 2021

I CAN GO EVERYWHERE

 두 해 전 여름, 그러니까 세상이 마스크를 뒤집어쓰기 직전 해 여름, 나는 태국에 있었다. 일주일 가량의 휴가를 얻어 방콕의 카오산로드와 람부뜨리 로드에서 축제 같은 3일을 보냈다. 코끼리가 그려진 민소매와 냉장고 바지 차림으로 매일 타이마사지를 받고, 타이음식 쿠킹클래스를 듣고, 타이 음식들을 하루에 다섯 끼씩 뱃속에 쟁여 넣고, 소화한답시고 타이 맥주를 들이부었다. 그렇게 풍요로운 3일을 보낸 후 나는 다시 방콕 수완나품 공항으로 돌아가 국내선을 타고 태국 남부에 있는 끄라비라는 섬으로 이동했다. 


 약 두 시간 동안의 비행시간이 지나고 끄라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유명 관광지가 밀집된 지역이라 그런지 공항의 규모가 꽤 컸고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출국장을 나오니 시내 호텔로 나가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객들은 각자의 호텔 이름을 외치며 버스에 올랐다. 


 호텔은 저렴한 가격임에도 신식 건물에 깔끔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직 체크인까지는 시간이 남아서 짐을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끄라비는 온갖 관광지 액티비티가 넘쳐나는 곳이다. 호텔 근처 카페에 들어가 끄라비에서 보낼 3일 동안의 계획을 세우고 근처 예약 대행처에 들어가 등록을 마쳤다. 당일 오후에 시작하는 4 섬 투어를 시작으로 다음날 피피섬 투어, 셋째 날 쿠킹클래스와 ATV 순으로 알찬 일정을 완성했다. 


 4 섬 투어는 조금 시시했다. 끄라비 근처의 섬들을 배를 타고 투어 하는 내용인데 마치 성질 급한 한국인 맞춤형 투어처럼 느껴졌다. 발만 담그고 다음 섬으로 이동의 연속이었다. 스노클링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으나 스노클 장비는 오래되었고 핀도 없었다. 50명 정도의 인파가 다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배를 타고 내리는 과정이 너무 길었고 날씨마저 좋지 않았다. 바다를 경험할 새 없이 큰 배에서 작은 배로의 이동, 이 섬에서 저 섬으로의 이동만을 거듭하였으므로 나는 4 섬 투어라기보다 4 섬 이동으로 이름을 정정하기로 했다. 


 잔뜩 실망한 채로 귀가했으나 나는 끄라비에서의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일 있을 피피섬 투어는 내가 가장 기대하는 액티비티였다. 피피섬은 그 아름다움 때문에 영화 촬영지로도 많이 쓰였다. 사실, 나는 피피섬 때문에 끄라비까지 온 것이었다.      


 다음날, 그러니까 피피섬의 날이 밝았다. 아니, 사실은 날이 밝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도 많이 불었다. 예약을 취소할까 싶었다. 하지만 여기는 동남아시아니까, 변덕스러운 날씨로 유명한 동네니까 이 정도 비는 금방 그칠 것도 같았다. 지금은 9월. 끄라비에서 가장 많은 비가 내리는 시기지만 나의 헛된 희망은 꺼지지 않았다. 나는 나의 날씨 운을 믿었다. 내 이름의 뜻조차 그랬으니까. 비를 진압하는 자. 내가 눈도 뜨기 전부터 나는 그런 훌륭한 존재였으니까. 나는 당차게 픽업차량에 올랐다. 


 용달차에 지붕을 간단히 씌운 모양새인 그 차에 올라타니 양 옆으로 비가 들이쳤다. 바람도 양 옆으로 시원하게 불어 들었다. 천장이 낮아 고개마저 숙인 채 나는 또다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다섯 군데 정도의 호텔에 정차해 벌 받을 승객들을 더 태웠다. 면티셔츠가 비로 젖어들자 바람이 체온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온몸에 힘을 줘서 열을 발산시키는 방법으로 티셔츠에 묻은 빗물을 모두 증발시키기로 했다. 30분 후에, 차는 그로기 상태가 된 나를 드디어 놓아주었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이끌고 사람들이 향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가 탄 차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여기서부터 스피드보트라는 것을 타고 이동한다고. 또, 또 이동이다. 진절머리가 났다. 비가 그치기는커녕 더 굵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기껏해야 30분 동안 차로 이동하면서 내 에너지를 다 써버린 것을 후회했다. 더 근본적으로, 투어를 취소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다. 나는 주의를 분산시켜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마음먹고 온 여행이다. 각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피피섬을 보자고 여기까지 왔다. 그 자체로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말이다.


 가이드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멋지기는 개뿔 오늘의 투어는 취소라는 말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나에게 보라색 끈을 주었다. 손목에 묶으란다. 그렇게 나는 퍼플 팀이 되었고 투어가 중단되지 않았음에 실망했다. 가이드는 퍼플 피플을 자기 앞에 둥그렇게 모아서 큰 목소리로 오늘의 투어를 설명하기 시작했으나 어느덧 더 굵어진 빗소리와 그로 인해 술렁이는 사람들 때문에 알아듣기 힘들었다. 퍼플 팀은 16번 보트를 타게 된다는 것밖에는. 백여 명은 족히 될 사람들이 30명 단위로 쪼개져서 각자의 보트를 타게 된다는 것이다. 가이드의 뒤를 따라 선착장으로 걸었다. 나는 비옷을 입은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굵은 빗방울에 맞섰다. 고개를 아무리 돌려도 비바람의 방향은 정확히 내 얼굴을 향해 변화무쌍하게 바뀌었다.


 16번 스피드보트는 힘이 남아도는 사춘기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덩치는 성인이지만 아직 심장이 젊은 청춘. 세로로 긴 그 스피드보트 내부에는 양 옆과 중앙에 좌석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나라 지하철처럼 좌석이 옆으로 주욱 나있고 그 가운데 공간에 전방을 향한 좌석이 두 개씩 줄지어 있는 모양새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중앙부에 앉았다. 인터넷에는 스피드보트를 타기 전에 반드시 멀미약을 복용하라는 충고가 줄을 이었는데, 나는 바다사나이로서 멀미약을 호기롭게 배제했지만 또 불안하기는 해서 가장 흔들림이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중앙부를 좌석으로 선택한 것이다. 나는 설렘보다는 걱정, 기대보다는 불안, 흥분보다는 후회를 안고 보트의 시동소리를 기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는 정말이지 작은 지구촌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온 3대 가족과 청년들, 히잡을 쓴 중동의 중년 자매, 말레이시아 가족, 인도에서 온 청년 무리, 중국어를 쓰는 가족, 미국에서 온 백인 등등 각국의 여행자들이 저마다 이동에 이동을 거듭한 끝에 피피섬에 가겠노라 이렇게 같은 배를 타게 되었다. 나도 어엿한 한 사람의 외국인으로서 이곳에 와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한국인 커플도 있었는데 역시 현명하게도 내 바로 뒤 중앙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구촌 사람들은 저마다의 표정들로 각국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 인도는 역시 여유로운 나라였다. 사실 그 남자들이 인도에서 왔는지 어쨌는지 나는 확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호쾌하게 웃으며 출발을 기다리는 그들은 여유의 인도향을 내뿜었다. 내 바로 오른편에 세로로 줄지어 앉은 말레이시아 가족은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장남과 아직 1년도 채 살지 않은 차남을 대동하고 왔다. 나에게 한국에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 드라마를 즐겨본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불렀더니 작은 모자를 쓴 한 살배기 아기가 싱글벙글 나를 향해 웃었고 나 역시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히잡을 쓴 여자들을 보고는 물놀이를 어떻게 할지 궁금해졌다. 이탈리아 가족들은 할아버지, 3살 정도의 작은 딸, 할머니, 7살 정도의 큰 딸, 어머니, 아버지 순으로 내 왼편에 길게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맞은편의 이탈리아 청년들과 쉴 새 없이 농담을 하면서 특유의 화목함을 자랑했다. 한국인 커플은 셀카를 찍으며 조용히 출발을 기다렸다. 나는 온갖 나라의 냄새가 뒤섞인 이 보트가 조금 좋아졌다.


 보트가 모터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출발했다. 이제는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으로 뒤덮였고 바다는 파도 거품으로 뒤덮였다. 보트는 괜히 이름만 스피드보트인 게 아니라는 듯이 엄청난 속도로 바다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바다와 보트는 누가 더 험하게 놀 수 있는지 시합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 여파로 파도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보라가 보트 내부를 덮치고 각국의 사람들이 각국의 언어로 고통을 호소했다. 보트는 낮은 파도를 뛰어넘고 높은 파도는 뚫어내며 마치 접영 하듯 헤엄쳤다. 파도를 넘을 때마다 짧지 않은 도약이 있었고, 도약이 끝나는 지점에서 각국의 사람들이 통일된 언어로 단말마를 외쳤다. 어느 자리에 앉느냐, 그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의 엉덩이가 공평하게 들썩거리고, 몰아치는 물보라에 눈을 제대로 뜨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아이들은 공포에 질렸다. 물론 어른들도. 이탈리아 사람들의 유머도, 인도 사람들의 여유도, 말레이시아 가족의 단란함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람들은 눈을 감고 손을 맞잡고 팔짱을 끼고 악몽에서 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0분쯤 흘렀을까. 그 엄청난 속도는 대륙 간 이동도 순식간에 이뤄낼 것만 같았는데 우리는 놀랍게도 아직 바다 한복판에 있었다. 약속의 섬은 보일 기미가 없었다. 바닷길의 궤도가 안정권에 든 모양인지 보트가 속도를 줄였다. 직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흔들림에 달관한 모양새로 승객들의 상태를 체크했다. 사람들은 꼭 감았던 눈을 뜨고 가족들의 상태를 확인하며 서로를 걱정했다.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공포에 질린 채였다. 아마도 최고령자인 이탈리아 할아버지는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보이려 애썼지만 입술은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그의 작은손녀는 목청을 놓고 울부짖었고, 큰손녀는 그의 동생을 열심히 달래고 있었다. 마주 보며 허탈한 듯 너털웃음을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의 울먹이는 사람들도 있고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한 듯한 얼굴이 된 사람들도 보였다. 내 옆의 말레이시아 부모는 작은 아기를 마주 보고 안은 채 진지한 얼굴로 사태를 직면하고 있었다. 물론 멀미를 겪는 사람들도 있어서 직원들은 주황색 비닐봉지를 나눠주었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바다의 일렁임에 반응하기 시작하여 배급받은 비닐봉지를 적극 활용했다. 저마다 맞닥뜨린 재난에 대한 적응의 면모는 달랐으나 모두의 마음속에는 같은 종류의 억울함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괜히 왔다.


 나는 근처에서 좌석 손잡이를 붙잡고 서있는 직원에게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해버렸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인 이유. 그건 믿고 싶지 않은 대답이 돌아오기 마련인 질문도 있기 때문이다. 직원이 대답하기가 무섭게 잠시 멎었던 비바람이 몰아치며 바다를 다시 반죽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익숙한 듯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스피트 보트는 바다 위를 물수제비처럼 통통 날았다. 비바람이 커다란 양동이로 쉬지 않고 물을 끼얹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30 minutes more. 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억겁의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이 재난영화 배경음의 베이스를 차지하고 있던 모터 소리가 줄어들었다. 물벼락 벌칙도 양동이에서 물 조리개로 바뀌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적어도 세 시간은 흘렀을 터였다. 주름이 적어도 서른 개는 더 생겼을 터였다. 실눈을 뜨고 내려다본 손목시계는 놀랍게도 30분, 30분이 흐른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충혈된 두 눈을 생수로 헹구었다. 그러자 눈앞에 섬이 보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상 속의 동물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섬이 실재했다니. 존재 자체로 아름답고 고귀한 육지여. 누군가 환호했고, 누군가 그 환호에 다시 화답했고, 그러자 모두가 고개를 들어 섬을 바라봤다. 세상의 모든 히잡과 콧수염과 모자와 반바지가 차별 없이 젖은 채 기쁨의 웃음을 지었다. 모두가 알았다. 그 기쁨은 다름 아닌 생존에서 온 것이었다. 어떤 이는 내용물이 그득한 비닐봉지를 세 개나 들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유를 되찾고 사진을 찍는 이들도 생겼다. 모터 소리가 꺼지고 섬에 거의 다다르자 흐린 하늘 사이로 기다란 햇살마저 비쳐 들었다. 햇살이라니, 분에 넘치는 선물 같았다. 넘실대던 바다가 잠잠해졌다. 내내 울던 세 살배기 이탈리아 막내딸도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자 대견하게도 줄곧 동생을 달래던 맏딸이 안도의 울음을 울었다. 고작 일곱 살 남짓의 그 여자아이가 이제야 마음껏 울었다. 그 용감한 눈물이 너무 뜨거워서 내 눈마저 뜨거워졌다. 괜찮아. 다 괜찮아. 눈물을 머금은 파란 눈이 갈색 눈을 향해 끄덕였다. 온 세상이 다 따뜻했다. 온 세상의 눈들이 서로를 맞추며 온기를 전달했다. 내내 아비의 품에 안겨있던 말레이시아 아기도 방향을 돌려 세상과 눈을 맞췄다. 아비는 아기의 모자를 고쳐 씌워 주었다. 알록달록한 그 모자챙에 금빛으로 새겨진 문장. I CAN GO EVERYWHERE. 그 기적의 순간, 나는 벅찬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워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아기는 이전에 자기가 알던 평화 그대로라는 듯 온 얼굴에 행복을 지어 보였다.


 2019년 9월 아침, 끄라비 섬을 출발한 노아의 방주는 그렇게 어떤 섬에 도착했다. 물에 젖은 몸은 추웠고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렸으며 해안은 에메랄드 빛 대신 황토 빛 일색이었다. 그러나 그 섬, 그 기적의 섬은 가장 아름다운 육지로서 거기에 있었다. 나의 세상이, 우리의 세상이 같은 기쁨으로 웃음 지었던 그 기적의 순간을 기억한다.

기적과도 같은 일은 늘 있다. 우리의 생존은 그렇게 늘 감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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