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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 연습 Oct 24. 2021

운이 좋아서, 목표를 정하지 않습니다.

“다음 달에 쉬어요?”

 그땐 몰랐다. 이 말이 일상적인 인사말이 될 줄은. 이렇게 자주 쉴 줄은. 한 달 일하고 한 달 쉬는, 휴직과 복직을 반복하는 그런 인생이 나에게 펼쳐질 줄은. 그러다가 주객이 전도되어, 왜 잘 쉬고 있는 사람을 불러서 일을 시키는지 모르겠다며 우스갯소리마저 하게 될 줄은.

 그건 알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회사의 존립을 걱정하고, 그래서 실직을 걱정하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고, 그러니 상황을 어떻게든 대비해야 한다고, 이직을 하든 아르바이트를 하든, 뭔가 해야 한다는 대화를 하면서도 나는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는 걸. 그런 지난한 한숨의 대화에 기꺼이 참여하지만, 마음속 깊이 그들을 공감할 수는 없다는 걸. 나와 그들의 상황이 정확히 같음에도, '그들'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임에도 나는 공감을 노력해야 한다는 걸.



 무계획적 무계획- 너는 계획이 하나도 없구나  

 그래서 몇몇 동료들의 이직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의 결단과 노력이 너무 대단하고 놀라워 박수를 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선택이 안타까웠다. 내가 캠핑을 다니고, 테니스를 배우고, 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고, 영상편집을 배우겠다는 핑계로 컴퓨터를 사서 게임을 하는 동안에 그들은 문제집을 풀고 면접을 다시 봤다. 내가 한 달 동안 먹고 노느라 작아진 유니폼을 입고 다시 한 달 동안 일하며 유니폼에 내 몸을 맞추는 동안, 그들은 마지막 사진을 찍고 유니폼을 반납했다. 지금처럼 여유로운 삶을 어떻게 버릴 수 있지. 어차피 일하게 될 테니까 지금은 이 여유를 만끽해야지 왜 나중을 대비하는 거야. 지금이 아니면 휴직급여로 한 달 씩이나 쉬는 삶을 살 수 있겠느냐고. 지금이 아니면 베짱이의 삶을 체험해보지 못한다고. 그들이 비상식량을 열심히 모으는 동안 나는 드러누워서 그런 생각이나 했다. 

 그건 아마도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를 이룰 방법을 고민하고,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련의 과정을 내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르는 영역이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경외와 감탄을 보낼 뿐이다. 비행기가 땅에 내려앉은 시간이 더 많아진 지금, 오히려 나는 걱정과 고민이 줄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한다거나 하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줄었다. 버는 돈이 거의 반 토막이 나고, 어쩌면 실직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 나는 완벽하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적응했다.

 어차피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세상, 계획을 세워봐야 뭘 어떻게 하겠느냐는 허무주의적 발상 때문인 것도 같고, 어차피 상황에 맞닥뜨리면 어떻게든 하게 된다는 무책임한 자신감 때문인 것도 같다. 걱정 비슷한 감정이 들면 자동적으로 그걸 거부하는 방어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어떻게든 잘 지내왔다는 반증인 것도 같다.

 그래,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이런 게으르고 방만한 소프트웨어로도 잘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꽤 행복하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작금의 사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은 이 시스템이 나와 지금의 세상에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엄마가 그랬다. 나는 운이 좋다고. “야는 운이 좋다. 뭘 하든 잘 될 기다.” 다른 사람들도 다 있는데 그렇게 말했다. 그런 말을 할 때엔 실제로 운이 좋았는지 어쨌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발화자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꼭 그렇게 되라고, 하루키처럼 표현하자면 ‘마치 주문을 새겨 넣듯이’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민망해서 “엄마, 내 뭐 아무것도 안 할 건데. 지금 이대로도 너무 좋다.” 하고 말하지만, “그래, 그것도 좋지. 지금 마음 편하게 살면 그대로 좋지.”라고 말하면서도 한 마디를 꼭 새겨 넣는다. “야는 운이 진짜 좋다.” 

 그건 내 무계획 인생에 대한 보증서 같은 것이다. 뭘 하든, 뭘 안 하든, 그 말이 부적처럼 따라온다. 취업고민을 안 할 때, 휴학계를 내고 놀러 다닐 때, 하던 공부를 때려치우고 갑자기 항공사에 들어갈 때, 지금처럼 항공업이 힘들 때, 그런데도 이직 생각을 안 할 때, 누가 걱정이든 오지랖이든 한 마디 하려고 하거나 그래도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네가 지금 이럴 때냐고 스스로 나무라고 싶어질 때, 그 보증서가 부적처럼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괜히 든든해지는 것이다. 우리 엄마가 그랬다고. 만든 사람이 그랬다고. 그러니 다 괜찮을 거라고.


여행자의 시선으로 

  실험쥐는 갖가지 시도 끝에도 이곳 지옥을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른바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상태에 빠진다. 설계 자체로 이미 우울한 그 실험에서 실험쥐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최후의 방어를 한다. 여기서 벗어나겠다는 목표를 지우고, 목표 달성을 위해 시도했을지도 모르는 행동들을 지우고, 실패를 확인하고 겪을 좌절감을 지운다.

 실험쥐에게는 너무나 미안하지만, 남의 불행에서 내 행복을 찾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감히 말해본다. 나는 실험쥐가 아니다. 나는, 실험쥐가 아니다. 잔인한 실험 설계자도 없다. 그러니 탈출하겠노라는 목표를 정하지 않아도 된다. 실험 목적이 없으므로, 나는 나로 살면 된다.

 목표가 없어도 어디로든 갈 것이고, 그러다가 갑자기 목표라는 것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 날이 오지 않더라도 괜찮다. 지금 이대로 정말로 괜찮으니까. 못 이룰 까 봐 포기한 게 아니다. 누가 포기라고 말할까 봐 포장을 조금 해본다.

 무계획적 무계획. 아무 계획 없이 계획을 정하지 않는 것. 거창한 목표를 두지 않고, 내가 바라는 대로 흘러갈 거라 생각지 않고, 흐름대로 흘러가고, 그렇게 표류하고, 헤매는 게 아니라 여행하는 거라 생각하는 것. 그러니 나침반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 

 목적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인생이라는 것에는 오히려 그 편이 좋다. 타이트한 패키지여행보다는 일정에 매이지 않은 구불구불한 여행이 좋다. 나는 멀리 돌아 넓게 경험하면서 여행자의 시선으로 감사히 살아갈 것이다. 그래도 되는 것이, 나는 운이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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