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다이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일본에 입국한 지 한 달 만에 이별을 당했다. 이별의 말은 랜선을 통해서 전해져 왔다. 나는 실의에 빠진 채 어이없게도 잠에 들었다.
예상치 못한 숙면을 취한 나머지 머리가 이상하게도 맑았다. 맑은 머리를 이해하기도 전에 이별의 상황을 인식하고 말았다. 어젯밤의 대화 내용을 곱씹었다. 잠은 기억을 돕는다 했던가. 이별의 말들이 베일 듯 선명했다. 그래서 상황을 더 똑바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별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열린 창문 틈새로 찬바람이 불어오는데 그걸 닫을 수가 없었다.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이별의 말들을 되뇌었다. 겪어본 적 없는 상실로 인한 무형의 고통. 심장의 공허를 통과하는 화살들. 그건 그 어떤 아티스트들도, 그 어떤 작가들도, 그 어떤 화가들도 묘사할 수 없는 형태의 것이었다. 스피노자가 말했다던가. 고통은 고통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그 순간 고통이기를 멈춘다고. 내 고통을 멈출 방법은 그뿐인 듯했다. 나는 저 먼 곳 세상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그 철학자의 말을 붙잡고 늘어졌다.
한참을 누워 있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너무 추웠기 때문이었다. 이별이 상당히 아프지만 춥기도 추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내 이별의 아픔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창문을 닫아야만 했다. 일어나니 배가 고파 밥을 먹기로 했다. 이대로는 이별의 고통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지막지한 이별에 교통사고와 같은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을 터. 지금 밥을 먹으면 저녁밥이겠거니 생각하고 시계를 봤더니 웬걸, 시간은 8시였다. 오전 8시. 무지막지한 이별을 겪었는데 아침부터 챙겨 먹어야 하다니. 이러다 점심이랑 저녁도 챙겨 먹겠네. 끼니를 다 챙기는 이별을 나는 배우지 못했는데.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실의에 빠져서 수염도 막 나던데. 나의 고통은 한 끼를 채 넘기지 못했다.
아침을 배불리 먹은 나는 다시금 고민을 노력했다. 나의 헤어짐이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대체 왜 그랬을까. 왜 내가 아니라 그 남자인가. 정답은 바로 나라고. 왜 모르는 걸까. 그걸 어떻게 강의를 해주어야 하나. 아무리 말해도 알아먹지를 못하는데 포기해야 하나. 그녀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너도 변할 거잖아. 이 사람은 이미 변했으니까 괜찮아. 하지만 네가 변하는 건 싫어.”
감정이란 변하기 마련인데, 그중에서도 사랑이란 감정은 더욱 예민하고도 복잡한 모든 감정의 총체와도 같은 것인데, 그래서 더욱 변치 않도록 잘 키워줘야 하는 것인데, 그녀는 이미 사랑을 포기한 사람처럼 말했다. 나는 생각을 거듭할수록 납득하기 어려웠다. 사랑을 포기하다니. 나더러 사랑한다며. 사랑의 결심이 있으니 사랑의 고백도 있는 거잖아. 날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사랑이 아닐 테고, 그럼 날 붙잡아야지, 왜 보내는 건데? 그 사람은 이미 변했으니까 괜찮다고? 그런 개말 뼈다귀 같은 소리가 어디 있냐고. 이제 스물 겨우 넘었는데. 썩은 사랑에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한들 80년분의 사랑이 아직 남아 있는데. 무슨 말을 해줘야 이 불쌍한 영혼을 거둘 수 있을까.
그렇게 아무런 답도 없이 이어지는 비난의 화살은 이윽고 나를 향했다. 사랑을 포기한 사람을 사랑했다니.
비정상적으로 맑았던 머리 때문에 진즉에 포기의 마음을 굳혔지만 겉으로는 아직 힘들어야 했다. 나는 사랑에 제일의 가치를 둔 사람이었다. 내 사랑이 채우던 자리, 그 커다란 공허는 남들이 눈치챌만한 것이어야 했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사이즈의 사랑 따위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그 공허는 웬만한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술 약속을 잡았다.
유학생들이 자주 가는 그 멕시코 느낌의 술집은 600엔이라는 싼 가격에 2시간 동안 술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는 뱃속에 싸구려 위스키를 거침없이 퍼부었다.
술 상대는 서울에서 온 유학생 형이었다. 수염 난 턱으로 거침없는 욕을 하는 이 사내는 정치와 철학에 관심이 많은 보기 드문 20대였는데, 우리는 논리 대신 억지로 중무장하여 서로의 주장이 싸구려라 비난하며 온갖 주제로 토론하곤 했다.
그날의 주제는 당연히 ‘사랑’이었다. “나 어제 헤어졌어요.” 한마디에 토론의 장은 시작되었다. 수염 난 논객은 사랑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걸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나의 사랑은 네가 알던 사랑 따위와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세상이 겪어본 적 없는 공허를 가졌으므로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 내 고통을 세밀히 표현할 수 없었다. 눈물을 글썽이는 쉬운 방법이 있었지만 그건 내 공허를 너무 쉽게 드러내고자 하는 비겁하고 치사한 방법이기 때문에 최대한 참기로 했다. 대신에 술을 퍼마셨다. 담배도 얻어 피웠다. 취해서 헤롱헤롱 했다. 속도 울렁울렁거렸다. 그래, 이별은 이렇게 힘들어야지. 나는 술에 취해 제대로 된 이별의 아픔을 겪는 것 같아 내심 기뻤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헛소리도 함께 해야 재미가 있는 법. 내가 아무 대꾸도 없자 그 형은 잠시 고민하더니 눈앞의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는 대뜸 냉철한 한 방의 말을 쏘았다.
“다음 이별이나 기다려 이 새꺄.”
그 말은 억지를 중무장한 궤변 따위가 아니었다. 연륜의 무게, 어른의 냄새가 짙은 말이었다. 그 말은 순식간에 나의 재난영화를 코미디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도저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삶의 순환을 이토록 잘 표현한 문장이 또 있을까. 아, 이 순환의 역사. 나는 그 뒤로도 몇 번의 헤어짐을 더 겪었고, 그때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던 것 같다는 느낌 역시 순환적으로 받기도 했고, 이번만큼은 진짜 사랑인 것 같다는 느낌 역시 순환적으로 받았으며, 어떤 때는 눈물이 똑똑 떨어질 만큼 진짜 아픈 이별을 겪기도, 어떤 때는 눈물도 나지 않는 허망한 이별을 겪기도 했지만 헤어짐이 찾아올 때면 그때 그 형의 말 한마디가 날아온다. 그 말은 내 삶을 저 멀리서 쳐다본 희극으로 만들어버린다. “다음 이별이나 기다려 이 새꺄.”
아, 이 순환의 역사.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