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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 연습 Oct 24. 2021

내 수염은 계약갱신청구권처럼

  그 문자를 받았을 때, 나는 새해를 맞아 부산의 본가에 있었다. 오랜만에 엄마의 밥상을 받았던 차였다. 저녁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물었던 차였다. 오랜 타지 생활과 그만큼 익숙해진 직장 생활, 그리고 오래된 연인과의 편안함 등으로 동요할 일이 없었던 내 마음이 차게 뛰었다. 별안간 이별을 통보받았던 그 옛날의 내 마음이 이랬던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문자는 내 오후 계획을 (세울 마음을) 송두리째 바꿔버렸음에 틀림없었다. 

 안녕하세요? 2월 10일이 만기일이네요 전세를 월세로 바꾸어야 합니다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 나는 6400만 원 전세대출을 받아 8000만 원짜리 집에 세 들어 살던 세입자였다. 손바닥만 한 원룸에 살면서 2년 동안 매달 40만 원 가까이 월세를 내다가(피 같은 내 돈) 중소기업 청년 주택자금 대출이라는 프로그램을 알고서 어렵사리 구했던 전셋집이었다. 당시에는 일로 바빴으니 쉬는 날을 쪼개고 쪼개 집을 보러 다니고 몇 번이고 은행에 들러 관련 서류를 준비했었다. 정부사업이니만큼 절차가 분명하고 꼼꼼해야 했다. 그중 내 소득이 충분히 적다는 것, 회사가 충분히 작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몸매 관리를 결심하고도 비포 사진을 찍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바디 프로필이 나올 애프터는 대체 언제일까. 

 어찌 됐건 나는 전셋집을 얻었다. 원룸에서 쓰리룸으로의 확장이라니, 그때의 감격이란. 친구의 소형 SUV로 충분히 운반이 가능할 만큼 조촐한 내 짐으로는 그 널찍한 공간감을 도무지 가리질 못했다. 그건 흡사 모든 것을 포용해준다는 수많은 종교들의 품만 같았다. 돈이 이래서 좋은 거구나, 나는 생각했다.

 침실에는 침대만 있고, 옷 방에는 옷만 뒀다. 숨이 트였다. 원룸에 살 때는 빨래를 말릴 공간도 없어서 방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빨랫줄을 걸고 옷을 널었는데. 잠에서 깨자마자 그 아래로 허리를 숙여 지나다가 순간 빈혈로 아득해져서 고꾸라진 적도 있다고. 하지만 이제는 베란다에 떡하니 세탁기와 건조대가 있는 삶이라니! 아니,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니! 집주인의 문자를 받자마자 그런 감사함이 다시금 출현했다. 그리고 아찔해졌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내가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엄마에게, 나 대구 올라가야겠다, 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차에 올라야 했다. 이제는 당연히 내 것 같은 집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내 집은 아니지만 2년이라는 시간은 그걸 착각할 만큼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대구로 향하는 차에 오르며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이 1월인데, 2월 10일부터 계약을 바꾸겠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세입자에게 집주인이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통보할 수 없다고. 전세를 월세로 바꾸거나 금액을 올리려면 적어도 몇 개월 전에는 말해야 한다고. 세입자가 그 변동을 대비할 수 있게, 혹은 감당할 수 없다면 다른 곳으로 옮길 준비를 할 수 있게.

 집에 도착한 나는 일단 내 집이 무사한지 확인했다. 물론 집은 무사했다. 그 어떤 서류도, 쪽지도, 스티커도 붙어있지 않았다. 내 집은 내 집인 상태로 그대로였다. 하지만 나는 그걸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전세를 월세로 바꾼다고 해서 내 집이 내 집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계약을 바꿈으로써 지불해야 하는 월세가 얼마일지 알 수 없었고, 주변 전세 가격이 많이 올랐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더욱 불안했다. 얼마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을 만큼 이 집이 좋았느냐 하면, 또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관리비와 공과금, 대출 이자를 포함해서 한 달에 20만 원도 되지 않는 돈으로 이 넓은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지, 대충 생각해도 5,60 만원 정도는 될 만한 월세를 나는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사를 갈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다. 직장과 더 먼 곳으로 가면 어쩌면 저렴한 전셋집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또다시 2년 전의 수고를 반복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계약 만료기간이 다가올수록 집주인의 연락이 올까 두려웠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나는 인터넷으로 임대차 계약법에 대해 알아봤다. 확실히 알아야 했다. 전세를 월세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 단호한 통보에 대항하려면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런 의무감이라니. 바꾸고 싶다거나 바꾸려고 한다는 표현이 가지는 유연함을 속 시원히 도 배제한 그 말투에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1년 전 바뀌었다는 집주인에 대한 정보가 턱 없이 부족했고, 그로 인해 막연한 두려움이 더욱 커졌으므로 나는 나 자신을 지킬만한 정보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으로 알아본 바로는 임대차 계약법이 바뀌어 본 계약을 바꾸려면 임대인과 임차인이 계약 만료일 2개월 전에는 협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이 만료 1개월 전이니까 묵시적 갱신이 완료된 것이라 했다. 즉, 이전 계약 그대로 한 번 더 계약이 된 것이라 본다는 것이다. 그것도 작년 12월부터 법이 바뀐 것이라 그 전에는 1개월 전에만 통보하면 세입자가 속절없이 받아들여야 했단다. 2개월도 짧게 느껴지는데 1개월 전에만 말해도 됐다고? 바뀌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다음으로 한 일은 전세계약을 했던 부동산에 문의하는 일이었다. 집주인과 곧 벌일 분쟁에서 ‘인터넷에서 알아보니’라는 말은 결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없었다. 서로가 인정할만한 전문가의 의견을 가지고 와야 했다.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이미 묵시적 계약이 완료된 것으로 보이며, 그래도 집주인이 따지거든 법률구조공단에 문의하라고 말하면 된다고 했다. 든든한 우군. 역시, 전세계약 때부터 푸근한 기억이 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분쟁을 최대한 키우지 않고 어떻게든 평화적으로 이 사태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어찌 됐건 나는 이 집에 2년은 더 살아야 했기 때문에 집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 했다.

 혹시나 일어날지 모르는 분쟁에 대비해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나는 먼저 문자로 해당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곧바로 집주인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70대 정도의 할머니 같았다. 

 통화는 길어졌다. 그 피곤한 통화를 요약하자면, 집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지 말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요약해서도 그렇지만, 실제로 “집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지 말이 많다”는 말도 했다. 다른 집들은 잘도 나가는데 왜 너만 그러냐는 식이었다. 어질어질했다. 나는 대화를 포기했다. 아, 네. 저도 다시 잘 알아볼 테니 사장님도 한 번 더 알아봐 달라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미 계약 갱신이 완료된 상태니 시간은 내 편이었으나 마음은 당연히 불편했다. 내가 주인인 이 집에 주인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찾아오면 어쩌지.     

 몇 시간 뒤, 아들이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중년의 남자였다. 그의 어머니와는 달리 따뜻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나는 대화가 통할 것 같아 안심했다. 그는 알아보니 내 의견이 맞다, 법이 바뀌었으니 위법을 행할 수는 없다, 단, 그 건물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어머니 용돈으로 쓰고 있어서 부탁을 해본다, 월세로 바꿔줄 수 없겠느냐 했다. 엥? 

 처음 든 생각은, 좋겠다,였다. 나도 부모님 용돈을 건물로 드리는 날이 올까. 생각했다. 부러웠다. 그리고 황당했다. 얼굴도 모르는 그분의 용돈을 내가 왜 억지로 올려드려야 하는가.

 결국 타협점은 5%의 전세금과 관리비 인상이었다. 묵시적 갱신이 완료된 상태라 하더라도 계약 만료일 전에는 협의를 통해 상한선 5%까지의 인상이 법적으로 가능했다.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400만 원을 추가 지급하기로 약속하며 분쟁은 끝이 났다. 관리비 10만 원에서 5%를 올리기로 했으니 달에 5천 원씩 용돈을 더 드리기로 되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가 남아 있었다. 계약서를 다시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그분의 얼굴을 맞대면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그날을 위해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도록 대비해야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겨우 수염을 기르는 일 정도였다. 우습게도, 하지만 정말로 기껏 생각한 게 수염을 기르는 일이었다.           

 그분은 남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를 대동하고 등장했다. 나긋한 인상의 그 할아버지에 대해 그분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는데, 아들의 목소리가 풍기던 분위기와 비슷했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은 뭐랄까,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좋은 남편을 만났다, 그 이상의 표현은 떠오르지 않았다. 닦달하는 말투는 나뿐만 아니라, 이 집에 지급된 옵션을 다시 체크하던 할아버지에게도 향했다. 이 집에는 처음 들어와 본다며 살림살이를 체크하면서, 요즘 젊은이들은 아메카리노 같은 걸 먹는다던데 그런 건 없냐고 물었다. 집을 깨끗하게 쓰는 것 같다고 다행이라 이야기하면서도, 법이 바뀌었으면 젊은 사람이 먼저 알려줘야 한다고 꾸짖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주셨고, 나 역시 진심을 담아 두 분에게 돌려드렸으나, 할머니는 어찌 됐건 2년 동안은 살게 되었으니 잘 살고, 그 뒤에는 꼭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줄곧 마스크를 낀 채였다. 마스크를 벗을 수는 없으니 길러둔 수염이 소용이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만만이 취급 방지를 위해 애써 기른 수염이 우스워서 속으로 혼자 웃는 것으로 만족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400만 원을 이체하고, 집주인이 나가고, 내 공간에 다시 나 혼자 남게 되자 이상하게도 자꾸 헛웃음이 났다. 마스크를 벗고 손을 씻으며 수염 난 이상하게 생긴 얼굴을 보자 자꾸 웃음이 났다. 할아버지의 행복을 기원하고, 나와 할머니 사이에서 고생했을 아들이라는 분의 행복을 기원했다. 전세를 월세로 바꾸고 그만큼의 용돈을 더 가지기를 원했을 할머니의 행복을 기원했다.      

 그러나 2년 뒤에 다시 만료일이 찾아오면 그때는, 집주인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년 뒤에는, 이 집을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좋은 전셋집을 찾거나, 어쩌면 온전한 내 집을 갖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두를 위해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2년 뒤에도 이사를 가지 못하는 형편이 된다면 나는, 오늘은 드러내지 않은,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그 시꺼먼 수염 같은 걸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이익과 권리를 다시 지켜야 하는 날이 찾아온다면 나는 도저히 내 것 같지 않은 새까만 수염을 입과 턱 언저리에 또 덕지덕지 붙여야 할 것 같다. 모두를 위해 그날이 오지 않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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