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세상이다. 이 영상이 끝나면 내가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유튜브는 곧이어 다음 영상을 재생시켜준다. 신기하게도 내가 좋아할 만한 영상이 또 자동으로 나온다. 나는 일시 정지된 채 그대로인데 세상은 계속 재생된다.
공간은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똑같이 유튜브를 보는데 저 친구가 구독하는 채널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런데 그 세상에도 사람이 몇 십만, 몇 백만이란다. 저 친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로 잘 모른다. 그런데 유튜브는 잘도 알고 매번 추천해준다. 안다는 듯이 추천해준다. 검색어를 넣지 않으면 나는 영영 다른 세상을 살 것만 같다. 어쨌든 그게 기술이란다. 알고리즘이란다.
알고리즘은 아는 말이었다. 수학 시간에 배웠다. 네모 상자 안에 뭘 집어넣으면 화살표를 따라가면서 결과물이 나오는 연산 시스템. 아니 모르는 말인가? 알고리즘과 알고리듬은 다른가? 찾아보니 하나가 다른 하나의 잘못된 표기인 것도 같고, 이제는 같은 말인 것도 같다. 나는 알고리'즘'을 한국어로 제대로 표기한 것이 알고리'듬'인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알고리듬이 맞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건, 나조차도 잘 모르는 것 같은 나의 알고리즘을 유튜브는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더 좋아할지도 모르는 전혀 다른 세상에 대해 알 기회가 없다는 것이고, 사실은 그런 자각도 없이 내 세상, 내 알고리즘 속에 스스로 갇혀 있다는 것이다.
대학시절 나는 ‘대학생활원’이라는 기숙사 관리소 같은 곳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했던 적이 있다. 업무강도가 높지 않고 공강 시간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두세 개씩의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던 내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였다.
그곳에서의 내 주요 업무는 기숙사 생활 전반에 걸친 문의전화들을 각 관리 담당자들에게 연결해주는 것이었다. 우리 학교 기숙사에서는 생활규정을 벌점제로 관리하고 있어 벌점 관련 문의가 많았고, 그 외에 시설 보강에 대한 요청이나 기숙사 배정 조건에 대한 문의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늘 같은 종류의 문의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3천 명에 가까운 원생들과 가족, 미배정 인원들은 갖가지 이유로 전화를 걸어왔다. 이곳 이름이 ‘대학생활원’이라는 이유로 대학이란 어떤 곳인지 묻는 외부전화까지, 전화기는 쉴 새 없이 울렸다.
당시 나는 새로운 환경은 반드시 성장을 부른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게으른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건설적인 학생이었던 것 같다. 생활비와 학비를 위해 어차피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면 이왕이면 새로운 것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다양한 종류의 일을 하고, 어느 곳엘 가든 빠르게 적응한다(고 느끼)는 데서 만족감을 얻던 시절이었다.
‘대학생활원’에서의 새로운 경험은 ‘업무적 통화’였다. 업무적 통화는 내가 알고 있는 사적 통화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상호 간의 친분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업무적 통화는 통화 그 자체로 매우 기능적이며 기계적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고 그 내용을 카테고리 별로 빠르게 분류하는 것이 곧 핵심역량임을 깨달았는데, 이를 알고리즘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나는 맨 먼저 문의 내용이 이곳에서 처리하고 있는 업무인지 아닌지 판단해야 했다. “기숙사 밥이 맛없어서 안 먹고 있는데 환불받을 수 있나요?”같은 문의 전화는 해당 기숙사 담당자에게 연결한다. 아마도 담당자는 “개인적인 이유로 인한 결식은 인정하지 않지만 증빙할 수 있는 대외활동이 있다면 그 기간에 대해서는 환불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대답할 것이다. ‘대학생활원’의 업무와는 관련 없는 문의전화, 예컨대 “아들이 자취를 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하면 기숙사에 넣을 수 있을까요?”, “대학교 총장이 이번에 바뀌었던데 자꾸 그런 식으로 운영을 하면......”, “거기 학생들 생활비가 평균 얼마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까?”, “어디 학교랑 통합한다던데 사실입니까?”, “대학 생활하는데 노트북이 꼭 필요한가요?” 등의 질문에는 “이곳 업무가 아니라 대답해드릴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정도의 답변으로 대화 종료를 시도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이곳에서 처리하는 업무인지 아닌지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곳의 업무가 맞다 하더라도 내가 계속 들을 필요는 없다. 정량적 측면에서, 상세히 들을수록 정확도는 높아지지만 처리 속도는 낮아진다. 정성적 측면에서, 상대방은 단지 교환원일 뿐인 나에게 상세히 이야기할수록 담당자 연결 후에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짜증이 생기며, 담당자 역시 그 짜증을 감내하는 짜증을 수반한다. 만약 우리 업무에 해당되지 않는 전화라면 더욱 수화기를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문의 내용을 최대한 간략히 들으면서 빠르게 카테고리를 분류하여 적당히 말을 끊는 일에 집중했다. 내용 전달 방식이 깔끔한 두괄식이어서 업무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미괄식 스토리텔러들의 문의전화 역시 많았는데, 나는 상대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인지 빠르게 판단하여 미리 말을 끊고 용건을 물어야 했으므로, 수화기 너머 발화자의 단 몇 마디를 바탕으로 음성적 특성을 파악하는 일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성적 특성들을 근거로 사람들을 직관적으로 분류하는 일에 익숙해질수록 그것은 업무적 판단에서 호오판단으로 변질되어갔다. 두괄식은 좋은 것, 미괄식은 싫은 것으로. 그도 그럴 것이 두괄식은 빠른 업무처리로, 미괄식은 이를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통화상대의 음성적 특성만으로 업무 흐름을 예측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분명히 확증편향이었지만 유능감을 얻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스스로 일처리에 능숙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알고리듬에 만족했다.
그 전화가 걸려왔던 그날도 나는 그렇게 한껏 고양되어 있었던 것 같다.
“네, 대학생활원 근로장학생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아... 저기.. 대학생활원 맞나요?”
나는 그의 머뭇거림과 발화의 평균적인 속도에 미루어 짐작했을 때 내 업무처리에 협조적이지 않을 것임을 대강 느꼈지만, 그런 마음은 숨기고 친절한 사무원의 목소리로 간결하게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말씀하세요.”
그는 수초 뒤에 건조하게 대답했다.
“..... 아, 네.”
또다시 정적. 이야기를 쉽사리 시작하지 못하는 건 벌점으로 인한 퇴실이 가까워진 학생들이 주로 보이는 특성이었다. 그러나 벌점을 없앨 수 있는 수단이 있는지, 혹은 퇴실 기일을 늦춰줄 수는 없는지 등을 물으려는 데서 오는 그들 집단 특유의 황망함, 비굴함, 조급함 따위의 감정이 그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음성은 무미건조에 가까웠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무던해지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말씀하세요.”
“아 네, 변기에 뭐가 빠진 것 같아요.”
뭐라고? 그의 음성은 아까처럼 딱딱했다. 그러나 그 음성적 특성과 발화 내용이 어울리지 않았다. 변기에 뭐가 빠졌다고? 빠진 게 뭔데? 아, 물은 게 그거지. 아니 본인이 확인해보면 되잖아. 꺼내 달라는 건가. 혹시 변기가 막혔는데 민망해서 그러는 건가. 목소리는 그게 아닌데, 뭐지. 부탁하는 것 같지도 않고. 변기에 뭐가 빠졌는데 뭐?
만약 이 사람이 두괄식으로 변기가 막혔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면 간단했을 거다. 수화기를 잠깐 손으로 가리고 저편에 앉은 시설관리자에게 물어보면 그만이니까. ‘변기가 막혔다는데 그런 것도 여기서 처리해줍니까?’ 같은 식으로. 그러나 지금의 경우는 정보가 부족했다. 관리자에게 ‘변기에 무언가 빠진 것 같다는데요’라고 물으면 ‘뭐가 빠져?’ ‘막혔대?’ ‘꺼내 달라고?’ ‘빠졌는데 뭐 어쩌라고?’ 등의 반문이 올게 뻔했다.
꼭 필요한 정보를 쏙 빼놓고는 시치미 떼는 이 사람이 미웠다. 알고리듬대로 착착 진행되지 않는 이 상황이 불편했다. 수화기 너머의 마음이나 상황이 도저히 그려지지 않아 당혹스러웠고, 그렇다고 내 쪽에서 먼저 묻는 것도 싫었다. ‘변기에 빠진 게 뭔지 궁금하신 건가요?’, ‘빠진 걸 꺼내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등의 질문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어떻게 말해도 내 쪽이 무례하게 느껴질 것 같아서. 무례한 건 그쪽이지만 내 통화소리를 옆에서 들을지도 모르는 직원들에게 오해받는 게 싫어서. 그리고 진짜 궁금한 것, 구체적 상상을 위해 꼭 필요한 ‘그래서 지금 변기가 막혀있는 상태인가요?’는 도저히 참혹해서 싫었다. 나는 피어오르는 짜증을 꾹 참고 상대의 말을 그저 반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황당하다는 뉘앙스를 지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변기에 뭐가 빠진 것 같다고요?”
상대는 대꾸하지 않았다. 내 자리는 출입구 앞에 홀로 떨어져 있어서 내 옆얼굴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눈길이 느껴지기 시작했다(그들의 업무로 바빠서 나를 쳐다보고 있을 리 없었지만). 공기는 무거워져 일순 가라앉았다. 공기가 내려앉은 자리를 비집고 그의 한숨소리가 스며든 것 같기도 했다. 내 머릿속에는 갖가지 장면이 재생되었다. 무지개 색으로 흘러넘친 변기, 체육시간에 스탠드에 홀로 앉아있는 왜소한 고등학생, 부모에게 대드는 아들, 벗은 모양 그대로인 청바지, 빨간 스프가 스며든 컵라면 용기와 굴러다니는 맥주 캔 등등. 보이지 않는 상대방을 그렇게 마음대로 그리고 있는데, 한숨을 집어삼킨 메마른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넘어왔다.
“제가 눈이 안 보여서요. 변기에 뭔가 빠진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서.”
그의 말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한 마디에 그의 처지가 모두 이해됐다. 그가 했던 말들, 말과 말 사이의 공백들, 그리고 그 모두를 잇는 메마른 목소리와 감정이 이해됐다. 아니, 이해됐다는 것 역시 내 억측이다. 나는 그의 인생을 모른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고,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고, 현재의 그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는 내가 아니다. 그러니 함부로 안다고 말하지 말라. 그에 대해 방금까지 속으로 욕하던 놈이 대체 뭘 안다고 말하는가.
나는 말을 잃은 채 수화기를 그대로 들고 있었다. 메마른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그러나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은 악취 나는 죄악감을 아무 천 쪼가리라도 들어 대충 가려두고, 제멋대로 삐져나오려는 동정심을 구겨서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빨리 이 일을 처리하는 것. 알고리듬대로, 그것뿐이었다. 간신히 동과 호수를 물어 시설관리자를 곧 보내겠다고 전달하자 전화가 끊겼다.
비로소 나는 무거운 수화기를 놓았다. 내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모습이 내 눈에 비쳤다. 가까운 곳에서 타닥타닥 키보드 자판소리가 들렸다. 문의전화를 받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밖으로 학생들이 지나가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내 시선은 여전히 전화기에 꽂혀있는 채였다. 내 시선은 여전히 전화기에 꽂혀있는 채로 천천히, 그러나 뚜렷이 먹물처럼 어둠이 침범하며 흐려졌다.
모두가 이곳 세상을 산다. 그러다 보니 착각할 때가 있다. 내 단순한 일상이 곧 세상이라고. 알고리즘에 갇혀서는 그게 세상 전부 인 양 여길 때가 있다.
나는 내 직업적 특성 때문에 다양한 국적과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겪는다. 상공, 기내, 여행이라는 그 특수한 시공간 속에서 승객들을 보살피다 보면 세상이 참 넓다는 것을 느낀다. 이 널따란 세계가 이 좁은 기내에 다 들어간다는 사실이 놀랍다. 지나는 말 한마디에 에너지가 번뜩이기도 하고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화가 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늘 비슷한 업무, 그 루틴 속에 승객의 얼굴이 바뀌고, 내 기분이 바뀌고, 그렇게 내 세상이 휙휙 잘도 바뀐다.
가끔씩 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세상이 온다. 아니, 실은 가끔이 아니고 자주, 자주 그런다. 익숙해서, 다 안다고 생각해서, 자만심에, 혹은 비행기에 오르기 전 내 기분 때문에, 일을 마치고 가야 할 중요한 약속 때문에, 날씨 때문에, 같이 일하는 동료 때문에. 그러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 알고리즘은 내가 자각하지도 못한 효율과 규칙을 정해버리고, 일을 처리해버린다. 알고리즘에 적용되지 않는 사태가 생기면 발열한다. 화가 난다.
나는 잠깐 눈을 감는다. 내 감정에 집중한다.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든다. 그리고 바란다. 눈을 뜨면 이 깜깜한 세상이 걷히기를. 나를 내 세상 속에 가두지 않기를. 오늘 비행기에서 내릴 때는 부끄럽지 않기를. 이번에 수화기를 내릴 때는 제발, 내가 부끄럽지 않기를. 알고리즘 밖으로 나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