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내일에 겨울이 기다리던 2월 어느 날, 불쑥 봄이 왔다. 메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해가 따뜻하게 비추자 바람이 살랑거렸다. 잠깐 들렀을 뿐인 봄이 부끄럼에 도망가버리기 전에 책과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나섰다.
오래 앉아 있을 생각으로 잔뜩 주문했다. 샌드위치에 쿠키, 그리고 텀블러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쟁반에 받쳐 2층으로 올라왔다. 내 들뜬 감성과 안성맞춤인 테라스에 때마침 빈자리가 하나 있어 직진했다.
테라스 문을 열고 들어가는 동안 위태롭게 흔들리던 텀블러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놀랍게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그 하강 운동. 나는 손쓸 생각도 못하고 지켜만 봤다. 텀블러 뚜껑이 분리되고 얼음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커피가 쏟아졌다. 구두가 젖고 옷에도 튀고 커피는 아깝고.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수십 개의 눈이 내게 집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분명히 평화 그 자체였을 잔잔한 그곳이 나라는 돌멩이에 첨벙거렸던 것이다. 그들의 평화를 깨버린 데에 죄의식을 느끼며 미안함의 눈빛을 다시 담아 보내고 싶었으나 발개진 얼굴을 도저히 들 수 없었다.
그 사태가 벌어진 바로 앞에 40대 정도로 보이는 세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다행히 커피가 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이 건네준 티슈로 닦아보려다 아무래도 이 정도 티슈로는 한참 부족할 것 같아 화장실과 사건 현장을 오가며 수습했다. 내 눈에 밀대 걸레가 보였다면 나는 당장 그걸 잡아 바닥을 문댔을 테지만 그런 고급 아이템은 찾아내지 못했다. 화장실에서 떼어 온 페이퍼 타월로 커피를 닦고 얼음을 집어 모으는 사이에 봄마저 깜짝 놀라 도망가고 여름이 찾아온 모양인지 내 이마와 등에 땀이 흘렀다.
어느 정도 수습하고 나서 나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방금 커피를 쏟았다,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자 직원분이 괜찮다며 뒤처리를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물로 헹군 텀블러를 다시 내밀고 커피를 재차 주문했다. 그러자 사장으로 보이는 분이 커피 값은 괜찮다, 그냥 채워 주겠다고 해주셨고, 나는 감사함과 미안함을 거듭 전달했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구두에 묻은 커피를 닦아내려고 애쓰고 있는데 아까 현장의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지나가다 말을 걸어왔다. 옷은 괜찮은지 물어 와서 그렇다고, 쉬시는데 소란 피워 죄송하다고 대답했다. 커피를 다시 주문했는지, 혹시 공짜로 주지 않았는지 묻는 말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당연히 그래야지’였다.
아닌데, 당연하지 않은데. 당연한 건 내가 잘못했으므로 미안해야 한다는 것과 커피는 다시 돈을 내고 주문해야 한다는 것, 웃으며 뒤처리를 해주고 커피를 새로 담아 줬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인데.
아마도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직원이 텀블러 뚜껑을 제대로 닫아주지 않아서 음료가 다 쏟아졌다고 생각했으리라. 평화로운 오후에 혼자 그 수난을 겪은 눈앞의 청년이 가여워서 별 뜻 없이 한 말일 수 있겠지만, 나는 그 오해를 풀고 싶었다. 그러나 새로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그걸 받아 들고 돌아서는 사이 그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텀블러 뚜껑은 주문할 때부터 내가 갖고 있었다고, 그러니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은 잘못은 나에게 있다고, 커피를 운반하다 엎지른 잘못 역시 나에게 있다고, 그러니 카페에서 커피를 공짜로 다시 준 것은 순전히 호의였다고, 당신이 먼저 티슈를 건네어주고 내 옷과 가방을 걱정해주신 것과 같은 호의였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는 갑자기 정말로 가여운 청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나는 호의로 둘러싸인 이 아름다운 곳, 겨울 속 봄에 사는데. 누군가의 세상에서는 텀블러 뚜껑 참사의 피해자 1로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일기에 이렇게 쓸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늘 카페에서 커피를 다 쏟은 청년을 보았는데, 옷이랑 신발이랑 가방은 다 젖고 쏟은 커피를 닦느라 고생하더라. 그래도 커피는 공짜로 다시 준 모양이다. 왜 텀블러 뚜껑을 제대로 안 닫아 줘서는.
혹은 이렇게 쓸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카페에서 커피를 다 쏟은 청년이 있었는데, 커피가 쏟아지는 그 소리가 아주 시원하더라. 그 소리에 대해 친구들과 한참을 얘기했다.
혹은 이럴 수도 있다.
오늘 카페에서 누군가 커피를 쏟는 걸 보았다. 그런 부주의함이라니, 그런 사람은 카페에 와서는 안 된다. 내가 카페 주인이면 블랙리스트에 넣을 듯.
이럴 수도 있겠다.
커피를 쏟는 일이란 참으로 낭비다. 커피라는 재화의 낭비이자 이를 치우는 엄청난 양의 휴지 낭비, 에너지 낭비, 그리고 그걸 치우는 동안에 주변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해지기 때문에 생기는 시간의 낭비.
모두 맞는 말이지만 중요한 한 가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 거기에 호의가 있었음을 빼먹은 것이다. 좋은 마음이 차지했을지도 모르는 공간, 그게 사라졌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생각 없을 것임을 안다. 우리는 대체로 별생각 없이 산다. 말 그대로 별일 아닌 일, 그것도 남의 일에 대해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별일 아닌 일을 별스럽게 생각하기에는 다른 고민거리들이 너무 많다. 고민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 없고, 만일 존재하더라도 그들 존재의 특성상 정말로 별생각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오해가 안타까운 것이다. 오늘 나의 세상에는 호의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세상에는 없다는 사실이. 호의란 것은 잊히기 쉬워서 별 것 아닌 호의도 다 품고 있어야 하는데. 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오해하거나 오해받아서 호의를 많이도 잃어버렸겠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는 명대사를 기억한다(그게 얼마나 회자되었으면 “호이가 계속되면 그게 둘리인 줄 안다”는 패러디까지 자동으로 재생된다). 짧은 문장으로 공감의 탄식을 불러일으킨 이 대사는 슬프게도 ‘호의를 행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편에서 말하고 있다. ‘호의를 권리인 양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말이다. 호의는 그대로 좋은 것인데, 이제는 잘 주는 것도 잘 받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 세상에서 호의는 폄하되기 쉽다.
우리는 호의라는 것을 잘 대해줘야 한다.
아주 작은 오해로 호의가 사라질 수 있음을 기억하기로 한다. 호의를 찾을 수 없더라도 내 시야에만 보이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내가 본 호의를 기억하기로 한다. 호의를 호의로만 생각하기로 한다. 그리고 되도록 남에게는, 특히 제삼자에게는 호의만을 전달하기로 한다. 호의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면, 호의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호의가 계속되더라도 둘리라 생각지 않기로 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 다른 세상을, 그렇지만 같은 이곳 세상을 사는 거라면 내 세상 정도는 호의로 가득 채우는 게 좋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커피를 쏟지 않도록 주의하자. 바리스타가 애써 만든 커피에는 커피콩을 재배한 노력과 그것을 운반하고 볶은 노력과 휴지를 만들기 위해 벌목된 나무들과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드는 비용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