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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 연습 Sep 26. 2021

유급휴직

돈 줄 테니까 쉬라고 해서, 그래서 겨우 알게 된 진정한 휴식

 회사는 돈 안 받고 쉴 사람을 모집했다. 쉬고 싶어서,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어린놈이 돈이라도 더 벌어야지 쉬기는 뭘 쉬느냐고,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내 주변에서는 다행히 나에게 아무도 그런 폭력적인 말을 전하지 않았지만 휴직계에 사인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그런 비슷한 느낌이 등허리에 스치기도 했었다. 


 그것은 조기교육이 이루어낸, 근면성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 탓이었다. 개근상이라는 족쇄를 채우고, 베짱이를 비난하고, 토끼의 안일함을 경계토록 하는 그 프로그램. 그로 인해 작금의 노동자들에게 놀고먹는 일이란, 꿈인 동시에 터부가 되어버렸다. 일하지 않는 자는 마음 편히 놀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세상. 차라리 불로소득으로 먹고사는 어떤 세상의 어떤 사람들의 존재를 몰랐다면, 그랬다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그래, 불로소득은 바라지도 않을 테니, 쉬게만 해달라고. 그동안 벌어 놓은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잠깐 쉬다 올 테니까, 그 뒤엔 다시 성실하게 일 할 테니까 쉬게 해 달라고, 그렇게 휴직 신청을 했다. 우리 회사에는 나 말고도 쉬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장 돈을 벌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당장 돈을 아껴야 하는 회사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었을 테지만.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재난의 국면이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당초 예상과는 달리 회사에 당장 필요한 직원의 수는 더욱 적었고, 운영은 더 힘들어졌으며, 어쩌면 더 오랜 기간 휴직을 이어나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회사는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하고 회사를 위한 우선순위를 전제했다. 이에 따라 공평하고도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의 무급휴직이 탈락되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지사에 있는 200여 명의 직원들 중 불과 20명이 비상경영체제의 근로자로 선택되는 이 상황, 그러니까 10분의 1에 포함되느냐 마느냐 하는, 90%의 확률로 쉴 것인가 10%의 확률로 일 할 것인가 결정되는, 에이 설마 내가 걸리겠어싶은 그 추첨에서 나는 보란 듯이 근로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휴직자들에게는 휴직과 관련된 세부사항이 첨부된 메일이 사내 메일을 통해 보내졌고, 나를 포함한 20인의 선택받은 근로자들에게는 비상경영의 변동 사항이 적용된 스케줄이 보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전 세계가 힘든 와중에, 실업자 그래프가 고공 행진하는 이 불행한 사태에 멈추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아니 분명히 다행인 일이어야 했다. 자칫하면 회사가 망할 수도 있는 위기상황에 회사를 위해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건 당연히 다행인 일이어야 했다. 하마터면 오늘의 출근이 더는 당연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근로자로 선택된 것은, 아무리 휴직을 바랐더라도 다행인 일이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출근이 억울했다. 남들 다 방학인데 나만 보충수업을 받는 기분, 아끼고 아끼다가 몰아 쓴 휴가 날이 당장 내일인데, 그래서 여행 계획도 다 세워뒀는데 갑자기 휴가를 반려당한 기분. 아, 갑자기 출근이 너무 싫었다. 그전에도 싫었지만 더 싫었다. 너무 싫어서 다시는 출근하지 못해도 좋으니 그냥 쉬게 해달라고 아예 사직서를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내 치사하고 못된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가는 강아지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아마도 그건 휴직자들의 처우가 유급휴직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무급휴직을 신청받을 때도 나는 휴직하고 싶었는데, 심지어 우리 회사 모든 근로자의 휴직이 유급휴직으로 결정 난 상황에서 휴직하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 나는 돈 받고 일해야 하는데, 누구는 돈 받고 쉬는 상황. 그러니까, 나는 지난달과 그대로인데 다음 달부터는 주변이 달라진다는 사실이 내 현재를 변하게 만든 것이다. 근로가 억울한 건 이제나 저제나 마찬가지지만, 유급휴직자들을 보니 내 근로가 한층 더 억울해졌다. 남들은 휴식이 일이 되고, 나는 일 사이에 휴식을 끼워 넣어야 한다니. 그런데도 부러워않고 겸허히 일을 해야 한다니. 자본주의는 상대성에 대한 민감성과 공평함에 대한 균형감을 기르는 데에 이렇게나 도움을 준다. 아, 머리로는 알겠는데, 아직도 억울하다. 참 못났다. 영웅은 난세에 난다고 했었나. 재난 상황이 벌어지자 우리나라 곳곳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나 나는 내가 영웅이 아님을 확인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그 억울함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3월을 맞이했다. 출근은 늘 그랬듯이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타의적으로 충실히 근로를 이어나가던 중 반갑고도 걱정스러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마도 다음 달도, 그리고 그다음 달도 지금과 비슷한 수준의 휴직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회사와 세계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었다는 것이 걱정스러웠으나, 다시금 찾아온 휴직의 기회가 자못 반가웠다.      


 우리 회사는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공명정대함을 무기로 하는 회사였다(무급휴직 신청을 반려하고 유급휴직으로 일괄 전환시킨 것은, 지나고 보니 공평한 처사였다). 그 말인즉슨 내게도 휴직의 기회가, 그것도 유급휴직의 기회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형평성을 따지고 보면 아직 근로를 하지 않은 150인의 사람들이 근로자가 되고, 50인의 현 근로자는 휴직해야 하니까. 쉴 기회든 일할 기회든 공평하게 나눠가져야 하니까. 그런 계산대로라면 나는 다음 달에 휴직자가 되는 것이었다. 



 떨렸다. 일을 하지 않는데 돈을 받을 수 있다고? 내가? 수능 직후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서 주간이든 주말이든 새벽이든 야간이든, 그게 집 앞이든 타지든 닥치는 대로 일 해왔던 내가? 심지어 취직이 결정되고도 단기 아르바이트를 잡았던 내가? 설마. 그런 일은 저기 먼 나라 이야기인 것 같은데. 적어도 2020년의 내가 겪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아프거나 실직을 당한 것도 아닌데 한 달을 쉴 수 있다니. 


 그러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내 세상에 말이다. 세상에 불로소득으로 먹고살 수 있다니.    


 쉬는 게 일이 되다 보니 당황스럽다. 너무, 너무 좋다. 내가 쉬는 걸 이렇게 잘하다니. 적성과 재능 모두를 가진 일이라는 확신이 생긴다. 내 천직이 휴식이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경제적 자유를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쉽사리 도전할 수가 없었다.


 이번 4월 한 달 동안은 일을 하지 않고도 급료를 받으면서 산다. 그러니 이제 내 일은 쉬는 것이다. 근면하게 잘 쉬어야 한다. 그게 내 본분이고, 그게 내 직업이니까. 가시적인 결과물이 도출되는 작업이 아니고, 회사의 시스템 없이 스스로 해내야 하기 때문에 성실성이 더욱 요구된다.


 물론 일할 때보다 더 적은 액수를 받는다. 하지만 어디 나갈 일도 없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이 정도 금액이면 한 달 충분히 먹고살 수 있다. 휴식이라는 걸 배부르게 먹고도 다음 끼니를 또 챙겨 먹는 생활을 이어가는 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나라 경제가 힘든 때라 더욱 값지다. 이렇게나 귀한 급료를 받아서는 대충 쉴 수가 없다.


 하루하루가 빨리 간다. 할 일이 많아서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일과는 달리 휴식은 그 자체의 연속이기 때문에 숨 쉴 틈도 없이 돌아간다. 일하고 있을 때는 생각만 하고 실제로 옮기지는 못했던 것들을 다 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출근 사이에 끼어 있는 휴일에는 차마 에너지를 끄집어낼 수 없었는데, 내일도 모레도 휴일이라 생각하니 에너지 걱정이 없다. 휴일의 개념 자체는 그대론데, 오히려 더 에너지를 많이 쏟고 있는데 도무지 지치질 않는다.      


 9시에 일어나서 30분 정도 주식 시장을 확인하고 내 주식들을 점검한다. 돈이 걸려 있으니 잠이 금방 달아난다. 주식시장에서 내 예측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손해를 볼 때도 있고 이익을 볼 때도 있다.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겨우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은 투자를 포기하지 않겠노라는 다짐뿐이다. 지금부터 관심을 갖고 같이 커나가지 않으면 나중에는 무지로 인한 막연한 거부감만 남을 거다. 


 11시 30분까지는 공부를 한다. 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과 미뤄둔 공부가 많다. 지금은 부동산 공부를 하고 있다. 내 생활 속에 있지만 나에게는 해당되는 일은 아닌 것 같아서 한 번도 관심을 갖지 않은 영역이다.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습관적 일상은 그것들을 모른 체 적당히 넘어가게 만든다. 내 목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거부감을 지금부터 서서히 줄여나감으로써 복직 이후에도 공부 욕구를 꺼트리지 않는 것이다. 도저히 물감으로 칠해지지 않을 것 같더라도, 밑그림을 그리는 일 그 자체로도 좋은 일일 거다.

 

 내 쳇바퀴는 잘도 돌아간다. 맨몸 운동을 하고 닭가슴살과 계란으로 간단한 점심을 먹고 글을 쓰고 뉴스 기사를 보고 운동 영상을 확인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경제 시사 영상을 찾아보고 저녁거리를 고민하다가 만들어 먹고 소화시키며 영화 한 편을 보면 하루가 다 가버린다. 읽고 싶은 책은 여전히 많고, 하고 싶은 공부도 여전히 쌓여 있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서 내일 하루는 어떻게 보낼지 머릿속으로 그린다. 어제보다 조금 더 뿌듯하고, 오늘만큼 조금 더 행복하다.


 하루 단위의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삶이란 성인군자들이나 해낼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막상 그런 하루들을 알게 되니 허무하게 보낸 내 지난날들이 아쉽다. 늘어지는 쉼 말고 쫀쫀해지는 쉼이 이렇게 값지고 쉬운 일이었다니. 만약 제일 잘 쉬는 사람 순으로 휴직자들을 뽑는다면 내가 여유 있게 선정될 것 같다. 다음 달에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면 그땐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다 휴식에 돈이라는 가치를 매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내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한편에는 ‘보상이 주어지는 일에 열심’이라는 코멘트가 달려있다. 그때는 아직 어린 날 속물로 보는 것 같아 속상했다. 지금 보면 그 선생님의 눈은 참 정확하다.     


기쁨, 즐거움 같은 무형의 가치보다 돈이라는 유형의 가치를 좇는 건 직장인의 생존에는 필수적인 자질이다. 무형의 가치를 따르는 건 재미와 재능이 돈이라는 가치와 합일을 이룬 운 좋은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무형의 가치를 좇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소파에 뒹굴면서 넷플릭스를 보거나 헤드폰을 끼고 게임을 하는 것, 맛집을 탐방하는 일 따위일 거다. 그러나 모두가 그러고 있으면 사회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집에서는 형태 없이 늘어져 있다가도 돈이라는 확실한 보상을 위해 일을 하러 나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필요하며, 나는 그 대다수의 삶을 산다.


그 옛날, 발표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어린 초등학생이 사탕에는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라도 수업에 참여시키고픈 선생님의 바른 마음이었겠지만, 나는 사탕이 없으면 발표를 하지 않는 수동적인 학생에서 돈을 주지 않는 일은 할 마음이 들지 않는 수동적인 어른으로 자라났다.     


알기 쉬운 이야기다. 그 어른은 이제 누구보다 열심히 쉬려고 노력하고 있다. 돈을 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휴식을 이토록 열심히 한다. 돈 받는 일은 대개가 하기 싫은 일인데, 이건 돈을 받는데 즐겁기까지 하다. 돈을 받지 않는 휴식도 이렇게 즐거웠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따라가다가 알아버렸다. 즐거운 건 휴식 자체가 아니라 휴식의 시간을 내 방식대로 채워보려는 능동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건 돈을 주지 않더라도 즐거운 일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그러니까 내가 마침내 이뤄낸 건 즐거움이라는 무형적 가치와 급료라는 유형적 가치의 합일 같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겨우 휴식이라는 것을.     


이게 휴식이었다. 이게 내게 맞는 힐링이었다. 에너지가 자꾸만 솟는 건 내가 제대로 쉬고 있기 때문이었다. 능동적인 휴식을 강제로 당해서 알게 되었다. 돈 줄 테니까 제대로 쉬라고 해서, 그래서 겨우 알게 된 진정한 휴식이었다. 출근과 출근 사이에 놓인 휴식은 다음 출근을 위한 에너지 비축일 뿐이었다. 출근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기뻐서 휴일을 너무 대충 좋아했던 거다. 쉬면서도 내일이나 모레에 있을 출근을 열심히 싫어하는 바람에 제대로 쉬질 못했던 거다. 휴일 자체가 보상이라 휴일을 활용할 생각을 못했던 거다. 휴일을 제대로 대해줬어야 했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보상과 처벌이 학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보상이 있는 행동은 강화되고 처벌이 있는 행동은 줄어든다. 이를 보여주는 다양한 실험들은 실험 설계자가 만들어둔 틀 속에서 이뤄진다. 실험자가 주는 보상과 처벌을 피험자가 받는다. 무슨 보상을 받을지, 무슨 처벌을 받을지, 무슨 행동을 할지, 그걸 피험자가 선택하는 실험은 없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설계자가 없다. 그런데 피험자는 있다. 나는 돈이라는 보상이 없으면 일이라는 행동을 선택하지 않는 피험자였다. 출근이라는 행동을 휴일이라는 또 다른 보상으로 강화시켜왔다. 세상이 다 그렇게 사니까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세상에는 나 같은 피험자들이 많았다. 우리들 피험자들은 설계자도 없는 실험을 자발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보상이라는 건 남이 아니라 내가 줄 수도 있는 거라는 걸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걸. 행동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면 실험쥐처럼 내 행동을 열심히 수동적으로 강화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내 출근은 더 능동적이고 내 휴식은 더 값졌을 텐데. 돈 말고도 값진 보상이 세상에는 분명히 있을 텐데. 그걸 찾아내는 연습을 했어야 했는데. 내가 설정한 쳇바퀴를 하루하루 열심히 굴리다 보니 그런 아쉬움이 든다. 어쩌면 나는 내 실험의 설계자일 수도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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