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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Dec 23. 2023

싸고 싶을 때 쌀 수 있다는 것

글 샐러리

신호가 왔다. 무슨 신호냐면, 아까 도시락으로 싸 온 요거트가 잘 소화됐다는 신호. 뒷주머니에서 슬쩍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본다. 11시 20분. 점심시간인 12시 전까지 러쉬 준비를 끝내야 한다. 과일도 다 썰었고, 테이크아웃용 컵과 뚜껑도 쌓아 놓았고, 쟁반도 닦아 두었고, 빨대나 컵홀더, 냅킨도 꽉 채웠다. 전반적인 준비는 다 끝냈고, 녹기 쉬운 얼음은 50분에 채우면 된다. 그런데도 신경 쓰이는 건, 손님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커피 음료가 두 잔, 키오스크 앞에 서 있는 손님이 두 명. 일하는 사람도 나를 포함해 두 명이다. 함께 일하는 알바생 재이의 눈치를 슬쩍 본다. 준비는 다 되어 있지만 재이를 혼자 두고 가도 될까? 나는 고작해야 4주 차, 재이는 8주 차 초보 카페 알바생이다.


두 시간 후에 나는 학원으로 두 번째 알바를 간다. 학원에서 볼일을 해결해도 되지 않을까? 일정 시간 이상 참으면 그다음부터는 참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 그 순간 작은 규모의 학원 화장실을 떠올린다. 화장실 또한 두 개다. 선생님용과 어린이용. 자연스럽게 “선생님 똥 쌌어요!”라고 외치는 미지의 목소리가 들리고… 안 되겠다. 재이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양해를 구하자, 선뜻 다녀오라 말한다. 다행히 나는 여러 해 전, 거친 여고 생활을 거치며 집 밖에서도 잘 싸는 타입이 되었다. 공공장소의 차가운 변기에 갈비뼈를 잔뜩 조이고 앉아야 하는 것만은 괴롭지만.


나는 바로 그 변기에 앉으며, 방금까지 “언제 싸야 하는가”를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것을 곱씹었다. 그러니까, 이번 주제 “퇴사 후 어떻게 살고 있는지”라는 주제에 대한 답으로 나는 싸는 시기를 고민해야 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꽤 가벼운 조로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밀도 있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주 5일, 8시까지 시청역 근처 카페로 출근해서, 출근과 점심시간 두 번의 러쉬를 마치고, 1시 반까지 공덕역 근처 학원으로 이동해 6시에서 7시 사이에 퇴근하는 일상. 원래는 이렇게까지 빡빡한 일정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오전 시간에 카페 알바를 하면서 취직 준비를 하자, 는 기존의 계획과는 달리 하루에 최저 임금을 받으며 5시간 일하는 걸로 자취하며 한 달을 먹고살기는 불가능했고, 넘치는 오후 시간을 감당하기에는 내가 너무 게을렀다. 나 자신에게 자유시간을 줄 바엔 돈이나 벌자. 취준은 퇴근 후, 아니, 에라 모르겠다, 주말에 하자.


그러나 내 인생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내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일단 육체노동은 생각보다 힘들고, 내 몸은 20대 초반에 비해 꽤 낡았으며, 주말에 만날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카페 알바를 시작한 첫 주는 발바닥에서 정강이, 무릎까지 시큰거렸다. 예전에 사둔 무릎 보호대를 차고 일을 해야 했다. 일은 괜찮았는데 무릎 때문에 그만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스무 살 초반에 예식장에서 일할 때 얻은 족저근막염도 도졌다. 틈틈이 발꿈치를 바닥에서 띄우거나 반대로 발 앞코를 들며 스트레칭했다. 한 달쯤 지나 카페 알바에 더해 학원 알바를 시작한 다음엔 집에 와서 저녁을 먹자마자 정신을 잃고 잠드는 날이 일주일에 2~3일은 되었다. 이래서는 평일에 노트북을 켤 수가 없었다.


그러니 주말에는 에너지를 보충해야 했다. 어떻게? 친구를 만나면서. 나는 극 외향형 인간이라, 주말에 사람을 만나야 뒤따르는 평일을 버틸 기력이 생긴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설거지를 할 기운이 없는데, 하루 종일 친구를 만나고 온 다음이면 겉옷을 벗자마자 설거지를 할 수 있는 기운이 나는 식이다. 그래서 주말 토요일, 일요일 내리 친구들을 만났고 하루에도 두 개씩 약속을 잡았다. 마포에서 잠실로, 혜화에서 용산으로. 글을 쓰는 12월 초반, 이 시점에도 주말 약속이 1월까지 꽉 차 있다. 이걸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지, 철딱서니가 없다고 해야 할지. 취직은 대체 언제 하려는지, 추석에 그렇게 우는소리를 하더니 설날에 친척들 얼굴은 또 어떻게 볼 생각인지.


하지만 생각보다 노동은 명쾌하고 개운한 느낌이 있다. ‘우울’을 배부른 자들의 질병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촘촘히 짜인 일과와 행위 하나하나에 집중해야 하는 육체노동 업무는 머리를 비우는 데에 도움이 된다. 과일을 썰고, 컵을 쌓고, 쟁반을 닦고. 혹은 책을 스캔하고, 인쇄물에 구멍을 뚫고, 단어카드를 코팅하고. 반복 작업은 때론 수행 같기도 하다. 몸을 규칙적으로 움직이다 보면 반대로 잡생각들은 사라지곤 했다. 키위를 깎는 동안 내 머리에 드는 생각은 키위 껍질을 어떻게 해야 얇게 깎을 수 있는지뿐이다. 덕분에 요즘은 잘 울지 않는다. 울지 않는 나도 나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다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씩 나아가면 된다는 생각. 자기만의 방은 있는데 500파운드는 아직 없으니, 일단 돈을 벌자. 그러면 어떻게든 글을 계속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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