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병아리콩
임금 체불로 퇴사했던 A사는 단행본부터 간행물까지 폭넓게 다루던 작은 출판사였고 새로 이직한 B사는 비교적 규모가 큰 교육 출판 전문 회사다. 이번 글에서는 두 회사를 통해 작은 출판사와 큰 출판사의 근무 환경을 비교하려 한다. 규모부터 매출, 다루는 출판물까지 다르기에 객관적인 비교는 당연히 어렵다. 나아가 이 회사들이 출판업 전체를 대변하지도 않을뿐더러, 나는 두 회사에서의 경력이 모두 짧기 때문에 적당히 걸러 읽으면 되겠다.
먼저 두 회사의 공통점을 떠올리자면, 요즘 시대에는 조금 촌스러울지 모르는 종이 매체를 주로 다룬다는 점, 그래서인지 글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 모이고 그 애정을 담보로 짜디짠 급여를 주면서도 정신과 육신을 착즙 한다는 점 정도가 있다.
각 회사에서 편집부 신입으로 일한 입장에서, A사는 스타트업, B사는 행정기관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타트업도 어렵고, 출판업도 어려운데 그 둘의 짬뽕이었던 A사 생활은 작은 배로 급류를 타는 듯한 경험이었다. 입사 첫날부터 책에 실릴 글을 쓰는 실무를 받았고 체계적인 인수인계나 DB는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좋을 수도 있었다. 회의 때 내가 낸 아이디어가 사업 아이템으로 곧바로 채택되기도 하고, 회사 체계를 제안할 수도 있었으니. 평소 관심이 있던 작가와 컨택하거나 인터뷰를 받아볼 때면 덕업일치에 짜릿하기도 했다. 내가 직접 노를 저어 회사라는 배가 나아가는 감각을 실감할 수 있었지만, 물이 튀면 직빵으로 맞았고 조그만 파도에도 회사가 뒤집힐 듯 난리였다. 재밌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장기적인 미래를 기대하긴 어렵겠다, 생각할 때쯤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내가 타고 있던 작은 배에 침몰 사이렌이 울린 것이다.
A사 퇴사 후 이직한 B사는 이사, 상무, 본부장 등등 어려운 직급이 산더미고 조직도를 보려면 안경을 고쳐 쓰고 집중해야 할 정도로 몸집이 큰 곳이었다. ‘월급 밀릴 걱정은 없겠다’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업무 효능감은 뚝 떨어졌다. 내가 방향을 결정할 순 없어도 직접 노를 저을 수 있었던 A사와는 달랐다. 나는 수천 명이 탄 커다란 배에 끼인 아무개가 되었고 이 배가 어디로 향하는지,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암울해 보이지만, B사에는 풍부한 DB와 노하우, 보고 배울 선배와 상사들이 존재했다. 업계에서 오래 굴러 본 회사라는 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최소한 이곳에서는 내 10년 후를 상상할 수 있었다.
회사 규모와 매출 측면을 떠나 업무 자체의 차이도 크다. A사는 한 달에 한 권 이상의 출판물을 펴내야 하는 곳이었지만 B사는 한 출판물에 들이는 시간이 엄청났다. 2~3년을 책 한 권을 위해 투자하기도 했다. 또한 A사는 기획부터 편집까지 비교적 자유로웠다. 각자 작성한 기획안을 공유하며 의견을 나눴고 윤문 규칙도 논의하여 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B사는 교육 출판 전문 회사인 만큼, 모든 요소를 보수적으로 결정해야 했다. 지켜야 할 규칙이 명확했고 오랜 시간 길들여 온 체계가 존재했다. 교육 목적의 출판물이 대부분이라 객관적인 사실 이상을 책에 담아내기 어렵다. 작업하다 보면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책은 안 사도 문제집을 위해서는 기꺼이 지갑을 열기 때문에 보수나 안정성 측면에서 형편이 훨씬 낫다. 각자 양날의 검처럼 장단점이 있다. 나는 지금도 어떤 스타일을 선호한다고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출판업이라는 바다에서 작은 배와 큰 배 모두에 몸을 실어 본 입장에서, 규모와 무관하게 출판업계 편집 인력은 마냥 이상적인 직장 생활을 즐기기엔 어렵다는 정론을 받아들이게 됐다. 출판 매체를 사랑하고 편집이 상당한 노하우를 요구하는 전문 분야라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는 더없이 슬픈 일이다. 책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순수한 열정으로 이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학을 떼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사실, 나도 언제까지 출판업에 머무를지 모르겠다. 종이 매체는 부정할 수 없이 힘을 잃고 있고 많은 편집자가 지금 이 순간에도 돈과 건강을 갈아 넣고 있으니. 그저, 어느 분야든지 본인 하기 나름이고 뛰어난 실력을 기른다면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다는 진리를 새기고 열심히 하루를 보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