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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Dec 19. 2023

새로움을 선택하기

글 올리브

세상 바쁜 상반기를 보냈는데, 직장을 그만두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시간이라니. 솔직히 몇 주는 행복했다. 일단 알림을 다 끄고 아침잠을 늘어지게 잘 수 있다는 것과 빈둥대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것. 잠옷을 벗지도 않고 침대 위에 베드테이블을 올려 놓으면 꼭 병원에 입원한 환자 꼴이다.


퇴사를 하고 자유의 시간을 어느 정도 즐기고 나면 슬슬 불안이라는 감정이 올라온다. 자유의 시간이 정말 괜찮은 건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취업을 하고 경력을 쌓아가는 것도 물론 너무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원하든 원치 않든 쉬어야 하는 시간이 온 거라면 이 시간이 주어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선택이고 마주하며 즐길 뿐이다. 


두 달 치 월급이 밀렸고, 우연히 계약서상의 급여일 다음 날이 적금 만기일이었다. 아깝게 다 모은 적금을 일부러 깨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부모님 집에 같이 살아도 이미 질러놓은 카드 값과 자잘한 생활비, 숨만 쉬어도 나가는 고정지출비가 있으니, 수입이 없는 상황에선 얼마 안 되는 적금이라도 있어 너무 다행이었다. 갑자기 백수가 됐다고 덜컥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순 없었다. 대충 한두 달은 어떻게든 버텼다. 하지만 그 이상은 어려웠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월급의 두 달치 전부가 밀리면 자발적 퇴사라도 실업급여 대상이었다. 나는 전 직장에서 1년 근무한 이력을 포함해 실업급여를 받게 됐다.


이것도 단순한 과정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임금체불로 인한 퇴사 코드를 정확히 입력해서 이직확인서를 발급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임금체불 관련해 여러 서류도 함께 제출해야 한다. 회사에서는 뭐든 원하는 서류를 떼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회계팀에서 이직확인서 처리를 엉뚱하게 하는 바람에 퇴사 후 5주가 지나서야 겨우 발급받았다. 내 한 달이 그냥 흘러간 것에 대해 화가 났지만 이렇게라도 내 권리를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사이 우리는 노동청으로부터 간이 대지급금으로 밀린 월급을 전부 지급받았다.


두 달 치 월급이 들어오니 밀린 카드 값부터 청산하고 스톱했던 적금도 다시 들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퇴사하자마자 어디로든 여행이나 훌쩍 떠날 텐데 당장 생활에 급급하다 보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탈탈 털어 아무것도 없어본 적이 수험생 때 말곤 없었던 거 같은데, 꿈을 좇는다는 게 이렇게 서글퍼질 줄이야. 급여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집에만 있는 게 답답했다. 우연히 알게 된 청년 시골살이 프로그램이 있어서 지원했다. 지역 협동조합에서 전액을 무료로 지원하고 5박 6일간 시골에서 ESG 체험을 하는 것이었다. 친환경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일단 어디든 집 밖을 나서고 싶어서 잘 됐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캐리어를 꺼내 간단히 짐을 쌌다. 추워진다고 해서 가을 겨울옷을 섞다 보니 부피가 컸다. 막상 떠나려니 귀찮기도 했지만 어디로든 떠나면 만나게 될 상황과 기회들이 기대됐다. 또래도 있었고 어린 친구들도 있었다. 다들 퇴사하거나 취•창업을 준비 중이거나 프리랜서를 하고 있었다. 쉬고 싶어서 왔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이미 집에서 지루할 정도로 쉬고 있어서 그랬는지 쉼보다는 새로움이 필요했다. 도시와 떨어져 시골에 들어오니 일단 머리를 식힐 수 있어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첫날 필름카메라를 나눠주고 참가자들 서로를 찍어주고 좋아하는 풍경들을 소소하게 담아보라고 했다. 질문 목록도 주고 서로를 인터뷰하는 시간, 기록을 할 수 있는 수첩도 있었다. 이런 것들이 내가 추구하는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다. 


시골에서 마을 주민들과 농사일을 돕고 땀 흘리며 일 한 뒤 먹은 밥상도 꿀맛이었고 맨발로 숲 걷기 체험한 것도 힐링 되는 시간이었다. 여기저기 시골 동네의 역사부터 이모저모를 살펴본 것도 너무 재밌었다. 환경을 위한다고 하루 동안 배출한 쓰레기를 모아본 것도 텀블러를 챙겨 카페에 가는 일도 평소에 알면서 지키지 못했던 것을 의식적으로 해보면서 변화를 조금씩 시도해 봤다. 마지막 날 밤엔 시골 밤하늘을 보면서 화로에 군고구마를 구워 먹고 30년 경력의 도예 선생님과 물레를 돌렸다. 필름카메라로 서로 찍은 사진을 나눠 갖고 내가 기억하고 싶은 풍경을 손에 쥐었다. 사진 속에 잊지 못할 시골 추억을 남겼다. 새로움 앞에서 가장 나다운 시간이었고 편안했다.


이 시간도 결국 끝나는 날이 온다. 불안해하기보다 신중히 다음 스텝을 준비하련다. 조급한 마음을 갖는다고 바뀔 상황도 없고 그저 주어진 오늘 하루를 이렇게 저렇게 채우다가 자연스럽게 찾아올 다음 시간을 기쁘게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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