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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Dec 12. 2023

막말로 편의점 풀타임을 해도

글 샐러리

입사한 지 두 달 반쯤 되는 날, 나는 책 『일할 자격』을 읽으며 여러 생각을 하다가 우리 회사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기록했다. 어디에나 들고 다니는 작은 수첩의 오른쪽에 먼저 좋은 점을 꼽고, 보통 빈 장으로 두는 왼편에 나쁜 점을 적었다. 그 내용을 정확히 아래에 옮겨 적어 보자면 이렇다. 


우리 회사의 나쁜 점 

1. 월급 낮음

2. 생각보다 자아를 죽여야 함

3. 월급/고료 밀리는 거 미리 말 안 해줌 

4. 화장실 청소해야 함


우리 회사의 좋은 점 

1. 시간 운용의 자유로움 (단점도 있음)

2. 꾸밈노동 필요 X 

3. 책 많이 읽을 수 있다!

4. 글을 계속 쓸 수 있다


‘월급’이나 ‘자아’와 같은 단어와 함께 ‘화장실 청소’가 당당히 리스트의 한 줄을 차지했다는 게 새삼 인상적이다. 나는 입사한 후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돌아가면서 당번을 정하면 한 달 반에서 두 달의 주기로 돌아온다고 하니 실제로는 그렇게 큰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일터에서 편집자의 업무가 아닌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 당번에 팀장급 이상의 직원들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나는 내 집 화장실 청소도 제대로 안 하는데… 

앗, 맞다. 이거 장점 쓰는 글이었지! 


사실 이렇게 장단점을 꼽아가며 고민을 했다는 것부터 단점을 상쇄할 만한 장점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난 이 회사가 좋았다. 회사에서 하는 일도, 일을 하는 방식도. 기획 회의를 하는 일은 다 같이, 할당된 업무는 완전히 내 기준과 리듬대로, 교정을 보는 일은 또 다 같이. 그런 방식으로 협업과 분업을 번갈아 하는 방식이 즐거웠다. 개인이 맡은 작업을 할 때 다른 에디터에게 더 나은 방향을 위해 의견을 묻는 경우는 있었지만, 일단 분업의 영역이 정해지면 대표나 다른 에디터의 기준이나 입맛이 영향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을 하면서 작은 회사 특유의 그런 자유로운 기조가 내게 잘 맞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임금체불만 없었다면 적어도 1년은 꽉 채워 근무했을 것이다.


 물론 리스트에 써두었듯 ‘자유’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오는 단점이 있었다. 예를 들면 대표가 협업 제안을 받아두고 잊어버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업무가 임박한 마감과 함께 불시에 찾아온다거나, 예정된 원고가 들어오지 않아 마감이 미뤄지는 일들... 계획이 틀어지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라면 이런 업무 환경이 힘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경우엔 크게 힘들진 않았다. 회사 업무 방식이 좀 Jazzy 하네요, 하고 괜히 농담이나 던지곤 코앞에 떨어진 마감을 순차적으로 처리할 따름이었다. 돌이켜보면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팀장급 직원들은 이상하리만치 뭔가를 정해두지 않고 신뢰로 뭐든 비비려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병원에 다녀오거나 일이 있어서 늦게 출근할 때 별도의 증빙 자료를 요청하지 않는 것, 회사 소유의 참고 도서 관리를 위해 엑셀로 색인 목록 따위를 만들자고 해도 죽어도 안 만든 것. 비록 그 얄팍한 신뢰는 몇 달 만에 깨졌지만 그래도 그런 방식이 나에게 꽤 편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겠다. 


그리고 좀 웃긴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꾸밈노동이 필요 없다는 게 좋았다. 말하자면 그런 분위기. 비슷한 상식을 가진 같은 성별의 또래로 구성된 사무실에는 이런 종류의 암묵적인 압박이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머리를 안 감고 모자를 쓰든, 슬리퍼를 끌고 가든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었고, 또 그러다 하루 예쁘게 옷을 차려입고 간 날에도 무슨 일 있냐,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냐 하는 호기심 이상의 선을 넘는 말을 듣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를 호의로 대하지만 불필요한 관심은 보이지 않고 간섭할 생각도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편할 수밖에 없다. 꾸밈노동이라고 퉁쳐서 말했지만 이런 분위기와 사람들이 좋았다는 이야기다. 회사 생활은 사람이 중요하다고들 하지 않는가. 


 퇴사하고 노동청에도 다녀온 다음, 우리보다 세 달 먼저 퇴사한 에디터 선배와 만나 커피를 마셨다. 이 회사를 일 년쯤 다닌 그는 노동청 민원 신고와 대지급금 및 퇴직금 수령에서도 선배였다. 우리는 노동이라든지 환경이라든지 미래라든지 그런 커다란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재밌던 주제는 아무래도 우리의 전 직장에 대한 얘기였다. 우리 둘 다 이 일 자체를 아꼈던 사람들로서 이 회사가 스러지는 것에 아쉬움을 동반하는 꽤 미묘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마저도 사치라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으나, 그래도 좋은 사람들을 얻은 것만은 수확이었다. 나는 함께 퇴사한 이들과 함께 에세이를 쓰고 있고, 그 역시 그보다 한두 달쯤 먼저 퇴사한 선배 에디터들과 계속 만나고 있다고 했다. 어쩜 이런 달란트를 받았을까, 우리 대표는… 


짧긴 하지만 이 회사에 다니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경험을 했고, 과정이 험난하긴 했지만 네 달치 업무에 대한 보상인 월급을 받아 연명했고, 일과 직장에 대한 가치관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포트폴리오에 넣을 네 달치의 결과물도 얻었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막말로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해도 돈은 번다. 그러니 내가 정말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이들과 일하는 걸 편안해하는지, 또 어떤 일만은 하기 싫어하는지 아는 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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