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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Dec 27. 2023

직업관이 없었는데요 생기고 있습니다​

글 병아리콩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에게는 ‘직업관’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직업 선택의 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히 답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고, 졸업을 위해 수업을 들으며 정해진 길만을 걸어왔으니까. 평생 학생으로 살며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 뚜렷한 직업관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 나는 그 무엇보다 경험을 바랐다. 나만의 가치관을 쌓아갈 수 있는 일에 대한 경험을.


졸업 후 1년 반이 지났고 나는 세 회사를 거쳤다. 행정직 교직원, A회사, 그리고 현 직장. 일이 너무 힘들어 울어도 봤고 노동청에 서류도 제출해 봤고 이상한 사람도 멋진 사람도 만났다. 여전히 미숙하고 어리석고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조금씩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중 몇 가지를 간단히 써보려 한다.


첫째는 입사 지원 때 ‘을’을 자처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행정직에서 에디터로 직무 전환을 준비할 때, 나는 자연스럽게 ‘뽑아만 줍쇼’ 모드가 됐다. 에디터 공고 자체가 희귀한 데다가 신입을 뽑는 경우는 그야말로 손에 꼽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입 에디터를 모집하는 회사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원했고 건별로 커피 한 잔 값 정도 주는 아르바이트도 고민했다.


강렬한 의지를 다지며 에디터 지원서를 난사했고, 어디든 날 받아주면 충성을 바치겠다는 마음을 키웠다. 내 취향이 아닌 회사라도 뽑아만 주시면 내 취향 시켜 드릴 자신이 있었다. A사 면접 자리에서 희망 연봉을 물었을 때도 ‘주는 대로 받겠다’라며 반짝이는 눈망울을 발사했다. 마침내 A사에서 에디터라는 직함을 얻어낼 수 있었지만, ‘임금체불’과 ‘체계는 1도 없고 뭐든지 대표 마음대로’ 등의 이슈가 함께 따라와 퇴사를 반복하게 되었다.


비전이나 체계라곤 없는 작은 회사가 얼마나 사람을 피 말리는지 몸소 경험하자 스타트업이나 창업에 대한 환상도 박살 났다. 작은 회사든 큰 회사든, 체계가 너무 형식적인 회사든 체계가 아예 없는 회사든 각자의 방식으로 힘들다는 걸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됐으니 나름 의미는 있었다. 다만 이제는 회사를 고를 때 꽤나 깐깐해져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던 시절을 넘어 조건을 하나씩 따지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슬퍼지기도 하지만, 회사 규모와 재정, 평가 등을 꼼꼼히 살피려 한다. 그리고 위험 시그널이 보이면 굳이 지원하지 않는다.


둘째로,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게 됐다. 직장인에게 직장을 바꾼다는 건 생활 방식 자체를 바꾸는 경험이다. 이직 도전이 정말 무서운 이유다. 회사는 직원을 길들이고, 새장에 익숙해져 문이 열려도 날아가지 못하는 새처럼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내 힘으로 내 하루와 인생 방향 전체를 바꾼 경험은 스스로를 더 믿고 신뢰하게 되는 값진 자산이 된다. 이직을 통해 시야도 많이 넓어졌다. 회사들이 이렇게나 다른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것, 퇴사한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 않고 하루는 똑같이 흘러간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충분한 준비 끝에 이직할 때 해당되는 말이다.


또한, 수식어 없이 나 자체로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지원서를 계속해서 쓰다 보면 지원서 속 내가 실제 나와 너무나도 다르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대학, 학과, 경력, 자격증 등 사실 정보를 나열할 때마저 그렇다. 나는 역사 관련 학과를 졸업했지만 역사에 대한 식견이 부끄러울 정도로 얕고 컴퓨터 활용 능력 자격증이 있지만 컴맹에 가깝다. 이력서 한 줄을 얻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을 쏟으며 고생했지만 이제와 돌아보면 그 수식어에 어울리는 능력을 갖추고 있진 않다. 물론 너도 나도 인사담당자도 이력서와 실제 실력이 불일치함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직을 준비하며 순수한 나 자체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혹독하게 깨달았다. 회사 울타리 밖에서 나의 가치는 정말 비참할 정도였다. 그래서 멋진 수식어에 걸맞은 사람, 수식어 없이 능력으로 증명하는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이 커졌다.


마지막으로 기록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사람은 기억력이 생각보다 나쁘고, 까먹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무지한 동물이다. 나는 퇴사한 지 불과 몇 주 만에 전 직장에서의 기억이 미화되기 시작했다. 더럽게 하기 싫던 업무도 ‘사실은 그 정도면 괜찮지 않았나?’ 싶어지고 ‘내가 왜 그렇게 힘들었지?‘ 되물을 정도로 진짜 기억이 안 난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도 기록이 중요하지만 미련 없이 잘 퇴사하기 위해서도 기록이 중요하단 걸 그래서 알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들을 했으며 내가 퇴사를 고민하게 된 이유가 뭔지, 지금 내 심정이 어떠한지 등을 꼼꼼하게 기록하면 뭐든 도움이 된다. 기록하는 순간에는 객관적으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고, 나중에는 더 또렷하게 기억하고, 고민 과정까지 자산으로 만들 수 있어서 좋다. 지금 이렇게 글을 남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N 년 N 월 N 일, 내 직업관이 이러했다는 작은 지표를 만들어두는 것이다. 언젠가 지금이 궁금해지면 그 지표를 따라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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