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올리브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릴 적부터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처했던 억압된 학창 시절을 통해 나는 실제로 사랑을 많이 받았다.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로부터, 어른들에게 사랑받는 나를 부러워하는 친구들로부터. 하지만 스스로를 사랑하진 않았다. 언제나 나에겐 각박하고 엄격했다. 나를 채워주는 사랑은 외부로부터 비롯되었으니까. 일명 착한 아이 증후군Good boy syndrome이었다. 인정받기 위해 순종적인 아이가 되기를 자처했다. 일찍 철이 들어 아이답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라면서 어른보다는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모두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인간관계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나는 책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다. 온갖 인간관계 책을 뒤지면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 발버둥 쳤다. 공통으로 책들이 말해주는 건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내 안에서 사랑할 만한 구석을 찾아야 했다. 흔적을 따라가며 작은 성취를 찾아보았다.
떠올려보니 처음으로 성취감을 느꼈던 것은 책 한 권을 완독 했을 때였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남은 시간엔 꼭 교내 도서관으로 향했다. 대출과 반납을 반복하며 내 아이디 밑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대출 이력이 뿌듯함을 주었다. 어른들에게 칭찬받을 때와는 다른 뿌듯함이었다. 그 기록을 보며 스스로 사랑할 용기가 났다. 학년말엔 다독왕 상장을 받았고 어떤 상보다 기뻤다. 그때부터 도서관은 나에게 안식처였다. 시험이 끝나면 친구들은 노래방과 놀이공원으로 달려갈 때, 나는 책방으로 달려갔다.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포근함을 느꼈고,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는 순간, 숨은 보물을 찾은 것 같아 벅찼다.
좋아하는 것을 알아채고, 나의 성취를 좇다 보니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 게 크게 중요하지 않아 졌다. 나만의 시간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자유로운 내가 남아있었다. 내 마음을 돌보기 시작했고 내가 나를 사랑하면서 그런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내 곁에 남았다. 나의 고민을 덜어준 책이 더 좋아졌고 책방을 자주 들락거리다가 내가 받은 위로처럼 나도 책으로 누군갈 위로하고 싶었다. 독립 출판한 책을 보고 하나씩 따라 하기 시작하면서 출판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엉성하고 미완성 같은 어설픈 책을 만들고 처음엔 얼떨떨했다. 누군가의 정제된 생각을 눈으로 훔치며 보냈던 그 시간이 쌓여서 나를 관통하는 문장들로 뽑아져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그 속에 어떤 냄새와 질감이 묻어날지 모르겠으나 담담하고 솔직한 위로가 누군가에게 잠깐이라도 가닿을 거라 확신한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되면 좋지 않다고 하던 어른들이 있었다. 나도 그 부분을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나라는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져야만 하는 고집불통의 성격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던지고 출판계로 직업을 바꾸자고 선택한 지금이 참 행복하다. 여전히 출판계는 불황이고 임금체불 사례는 차고 넘치고, 속임수를 통해 책을 내기도 하는 엉터리 회사들도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겐 책으로 밥을 빌어먹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 같은 게 있다.
별것 아닌 것으로 고민이 많았던 시절을 책과 함께 앓았던 것이 효과가 탁월한 양약이 돼주었다. 흔들릴만한 상황에서도 단단하게 버틸 힘이 되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훗날 나에게 무엇으로 남을지 기대가 된다. 책 편식을 해서 여전히 말주변은 없고 모르는 단어는 많으며 문해력이 그다지 좋진 않지만 그래도 책 읽기를 계속하고 싶다. 외출할 때 가방에 책이 들어 있지 않으면 어색한 것이 이미 약간의 강박이나 중독이 시작된 것 같다.
소원이 있다면 돋보기를 쓰는 그날까지 눈이 쉬지 않고 오래도록 글자를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손으로 책을 잡고 넘길 수 있도록 두 팔이, 손가락 마디마디가 멀쩡했으면 좋겠다. 곧고 바르게 오랜 시간 의자에 앉을 수 있는 튼튼한 척추와 푹신한 엉덩이가 있으면 좋겠다. 책을 통해 만난 인연들을 소중히 이어가도록 예쁜 말씨를 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나를 닮은 책과 함께 울고 웃으며 늙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