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샐러리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동료들은 주말이 시작될 즈음 완성된 글을 단체 메시지방에 올렸다. 하루 이틀 마감을 어기던 나는 이제 써야 할 글 목록이 한가득 쌓였다. 나에게 책은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 이번 주제를 두고 쓴 이들의 글을 읽으며 문장의 주인을 꼭 닮은 몇몇 표현들과 인용한 구절이 마음에 남는 한편, 나는 내게 책이 어떤 의미인지 고찰해 본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깜빡이는 커서를 보니, 커서를 한 이십 번쯤 깜빡이게 내버려 두고 보니, 실은 관성적으로 책을 좋아해 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반에서 책을 제일 많이 읽는 학생 중 한 명이었고, 그 사실이 뿌듯했던 것 같기도 하고, 예전만큼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지금에서는 어떤 부채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책을 좋아하는/좋아했던 이들에게라면 이 부채감은 흔한 감각일 것이다. 새 학기 첫날에 교과서를 받자마자 국어 교과서를 펼쳐서 소설을 모조리 읽어버리는 사람들, 화장실에서 힘을 쓸 때조차 유한락스 뒷면의 사용 설명서를 읽어버리는 사람들 말이다. 나도 분명 그런 사람 중 하나였으니 책과 이야기, 활자를 좋아하는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많이 읽지 않으면서도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나? 어쩌면 이건 오타쿠식 완벽주의인 것 같다. 너무너무 좋아해서, 이 정도로는 좋아한다고 할 수 없어! 하는… 그러니 일단 나는 책을 좋아한다! 고 선언은 해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나는 왜 책을 좋아하나? 관성이랄 것도 없었던 어린 시절엔 왜 책을 좋아했나? 어렸을 때라면 무엇보다 나는 '상상'이 좋았던 것 같다. 읽을 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들이 좋았다. 그러니 주로 문학을 읽었다. 내가 아는 만큼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만큼만 그려지니 도리어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싶어서 이런저런 다른 책을 독파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보면 실망한 적도 많았다. 심지어는 내가 책을 보면서 생각한 자동차 색이랑 다른데! 하고 실망하면서 화면을 꺼버린 적도 있다. 영상 매체는 상상의 여지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연출되지 않는 것은 보이지도 않으니. 어쩌면 요즈음 연극과 뮤지컬에 빠져 있는 건, 시간과 공간이 한정적인 장르이니만큼 오히려 생략되거나 없는데 있는 척하는 부분을 상상하게 되어서가 아닐까 싶다.
이에 더해서 무엇보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재밌어서다! 문학은 "창작물"이고, 문학이 아닌 분야라고 해도 재구성된 서술은 흥미롭다. 책에는 무엇이든 담길 수 있다. 흥미로운 서사나 매력적으로 꾸려진 캐릭터, 혹은 진솔하고 내밀한 비밀, 알려지지 않은 사실과 누군가에 의해 꼭 말해져야 하는 진실. 맥락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공들여 쓰인 만큼 책은 우선 재미가 있다! 그럼 재미가 없으면 안 읽냐! 요즘은 그런 것 같다. 부채감의 근원이라고 할까. 영화에서 유튜브, 이제는 15초짜리 숏츠까지. 내 도파민을 두고 경쟁이 참으로 치열한데, 책은 요즘 좀 뒤처지는 편이다. 그러고 보면 재미있어서 책을 읽는다는 건 너무나 얄팍한 이유다. 재미를 기준으로 책 편식을 하다가 이제는 그 재미마저 값싼 숏폼 콘텐츠에 다 빼앗겨버렸으니.
이렇게 한 시간 동안 꼬박 줄어든 독서에 대한 변명문을 쓰고 보니 반성을 좀 하게 된다. 내 마음은 그대로다! 그러나 넌 재미없어졌다! 같은 쓰레기 애인 같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았다는 점에서... 그러나 책을 계속해서 읽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고, 그 안에 분명 나를 생각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진실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도 그대로다. 아무래도 진리는 모니터가 아니라 책에 있을 것만 같다. 고리타분하다고 놀려도 할 수 없어. 이북도 안 돼. 내게는 직접 연필로 줄을 그을 수 있는 종이책뿐이야. 8평 남짓의 내 작은 자취방에는 읽다 만 책들이 책더미를 이루고, 나는 부동산의 문제를 절실히 느끼며 큐레이션이 훌륭한 동네 책방을 전전한다. 출판 업계에 얼마간 역할을 하겠거니, 생각하며 부채감을 조금은 덜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