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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Dec 25. 2023

책과 사람에게도 인연이 있을까

글 병아리콩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처럼 책과 사람에게도 인연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책은 갑자기 다가와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고 어떤 책은 사 두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도 결국 못 읽게 된다. 개인적인 예를 들자면 초등학생 때 읽은 <해리포터>는 나를 판타지에 열광하고 해리포터 OST만 들어도 심장이 뛰는 어른으로 자라게 했다. 어린 시절 도통 이해가 안 되는 난해한 책이었던 <어린 왕자>는 이십 대가 된 나에게는 감동의 눈물바다를 선사했다. 지금 말할 책은 나에게 <해리포터>나 <어린 왕자> 같은 파급력은 없었지만, A사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달콤 쌉싸름한 기억의 한 조각이 되었다.


그 책을 처음 본 것은 지인의 추천으로 방문한 마포에 있는 독립서점에서였다. 당시 나는 ‘독립서점’이 무엇인지 막 알게 된 참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특정 취향과 주제에 맞는 책을 베스트셀러부터 독립출판물까지 모아둔 공간이라니. 번잡한 도시 속 작은 숨구멍 같은 매력을 느꼈다. 마포 독립서점은 음료나 디저트를 주문하면 포장되지 않은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골라 서점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얇은 두께에 저렴한 종이, 투박한 삽화와 지나치게 자유로운 디자인까지 전형적인 독립출판물이었다. 앉은자리에서 술술 읽을 정도로 재밌었고 사회적 메시지도 담고 있는 좋은 작품이라, 제목을 기억해 두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책과는 전혀 관련 없던 일을 하던 내가 출판사 A사에 입사했고, 독자들에게 책을 추천하는 업무를 맡게 됐다. 작가에게 서면 인터뷰까지 요청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추천한 영화가 재미없을까 봐 차라리 홀로 영화 보기를 즐기는 사람이라서 다른 사람에게 책을 소개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졌다. 책 내용 중에 미처 고려하지 못한 논란의 소지가 있으면 어쩌지, 시의성이 떨어지거나 특정 나이, 성별, 직업의 사람에게는 어필이 안 되면 어쩌지 이런저런 고민이 앞섰다. 하지만 동시에 설레기도 했다. 여러 책을 조사하고 궁금했던 점을 작가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는, 책 덕후라면 덕업일치와 같은 업무였기 때문이다.


추천 도서 후보 목록을 만들다가 마포 독립서점에서 만났던 그 책이 떠올랐다. 검색해 보니 이 책을 눈여겨본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된 상태였다. 이전보다 훨씬 깔끔하게 다듬어진 책을 다시 읽어봤는데 여전히 좋았다. 당시 A사가 추구하던 주제나 가치와도 부합했고 다른 직원들에게도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독립서점이 뭔지도 모르던 내가 독립서점에서 알게 된 A사에 입사해 역시 독립서점에서 눈도장을 찍었던 책을 소개하게 되다니. 삶이란 마음만 먹으면 한 순간에도 바뀔 수 있구나, 느낀 순간이었다.


출판사를 통해 작가님께 연락을 드렸고, 감사하게도 서면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연락하다니. 도라에몽 찬스를 쓴 것처럼 설렜다. 진부하지 않고, 흥미롭고, 핵심을 관통하는.. 그런 육각형 질문을 생각하고 싶었지만 쉬울 리 없었다. 책을 읽으며 정리한 내용, 보도 자료, 기타 인터뷰 자료 등을 참고해 열심히 작성한 질문지를 보냈다. 회사 직함과 격식 있는 문자 속에 사심을 숨겨서. 보내주신 답변을 확인할 때는 나만을 위한 주문 제작 상품을 영접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껴졌다.


이후에도 좋은 책을 골라 소개하고 외고를 받고 서면 인터뷰를 하는 업무가 이어졌다. 생각할 점도 많고 어려웠지만 재밌었다. 내일 출근하면 이런 방향으로 글을 써봐야겠다, 어떤 책을 추가로 알아봐야겠다 등 일에 대한 생각은 출퇴근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고 그 과정이 스트레스가 아닌 적당한 압박감과 기대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A사의 재정이 원고료를 지급하고 서적을 제때 발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지자 상황은 달라졌다. 이러한 속 사정은 하나둘씩 오는 조심스러운 연락을 통해 알음알음 알게 된 것이었다. 애정 어린 마음으로 섭외한 분들께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너무 부끄럽고 화도 났다. 나는 재정 관리 권한이 없는 일개 직원이었기에 함부로 입을 놀릴 수도 없었다. 회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니 말을 아예 하지 않겠다”라는 웃기는 작전을 썼다. 회사 사정과 대처 방안을 내외부 관계자에게 솔직히 털어놓는 대신 냅다 회피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일에 대한 자부심과 두근거림은 자연히 사그라들었다.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지금은, 이 모든 게 다 예전 일이 됐다. 그래도 A사에서 일하며 접한 책들을 볼 때면 출판사 신입의 설렘과 좌절이 다 느껴진다. 지인의 추천으로 알게 됐던 마포 독립서점을 최근에는 내가 다른 지인에게 추천했다. 그녀도 잊지 못할 기억을 담을 수 있는 좋은 책을 그곳에서 발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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