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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Oct 16. 2023

차비 굳었네

글 샐러리

퇴사를 한 후 대중교통 요금이 올랐다. 서울 시내버스가 1,200원에서 1,500원으로. 물가도 많이 올랐고 2015년에 올린 이후로 처음이라고 하니, 그러려니 싶긴 한데 한 번에 300원이라. 확실히 인상폭이 크다. 퇴사한 다음이라 이제 고정 교통비가 안 들어서 다행이… 겠냐? 사실 나는 A사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산다. 그래서 애초에 교통비가 들지도 않았다. 구구절절 지원 동기를 적었지만, 합격 사실을 알았을 때 일단 다녀보자고 마음먹은 건 역시 그 이유였다. 출퇴근 고정 교통비 10만 원 정도를 아낄 수 있으니 보잘것없는 월급 실수령액에 10만 원쯤 더 붙었다고 치자. 실제로 직장과 도보 거리에 사는 건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았다.

 

장점 1. 시간을 아낄 수 있다.

이건 당연한 얘기.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이들은 자취를 하는 나를 제외하면 모두 꽤나 멀리 살았다. A사는 웬만한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외따로 떨어져 있으니, 어차피 어디에 산다 한들 가깝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내 자취방의 위치와 가까운 것이 기막힌 우연이었다. 그래서 도어 투 도어 15분인 나와, 1.5시간인 다른 셋의 출퇴근 양상이 좀 달랐다. 8시 50분에 일어나 대충 씻고 옷을 꿰어 입고 터벅터벅 걸어 9시 반 출근 마지노선에 맞춰 도착하면, 모두가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그중에서도 병아리콩은 뭐랄까, 회사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나와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는데, 출근길 러시를 피하기 위해 근무 시작 시간인 9시보다 이전에 회사에 도착해 아침을 먹고 간단한 운동을 했다. 보통 내가 눈을 뜨는 시간에 병아리콩은 이미 회사에 도착한 지 한참이었다는 뜻이다. 분명 시간을 아낀다는 장점이 있다고 했는데, 결국 내가 아낀 시간은 잠을 자는 데에나 쓰였다는 게 들통나버렸다.

 

장점 2. 점심시간에 집에 다녀올 수 있다.

A사의 점심시간은 아주 자유롭다. 대충 점심 어드메의 시간이라면 11시든 2시든 원하는 시간에 밥을 먹으면 되었다. 심지어 1시간이든 2시간이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누군가는 신경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 덕에 회사 근처에 볼일이 있던 친구와 밥을 먹으러 다녀오거나, 동료들과 함께 마을버스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카페에 가기도 했다. 그리고 내 경우, 집에 다녀올 수 있었다! 왕복 30분은 또 약간 부담되는 시간이기 때문에 매번 쉬러 가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 꼭 다녀와야 하는 일이 있었다. 네 달 남짓의 출근 기간 동안 나는 대부분의 점심을 냉동 볶음밥이나 파스타로 때웠다. 위에서 시간 운용을 못하는 편이라는 것도 들통났고, 음식 준비에 품을 들일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근길에 늘 빨간색 도시락 가방에 냉동 볶음밥이나 한꺼번에 잔뜩 삶은 후 냉동한 파스타면을 넣어 다녔다. 그런데 가끔, 그 가방을 식탁 위에 올리고는 완전히 까먹은 채 출근을 한 적도 있는데, 그럴 때 집에 슬쩍 다녀올 수 있었다. 집에서 후딱 밥을 먹고 회사에 두 번 출근하는 기분을 느끼며 집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도시락 가방을 까먹지 않았다면 뙤약볕이 내리쬐는 8월 정오, 도합 30분을 걸을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장점 3. 퇴사 후에도 커피 적립 쿠폰을 사용할 수 있다.

작년 말쯤 집 근처에 작고 예쁜 카페가 생겼다. 월요일에 안 연다든지, 콘센트를 사용할 수 없다든지, 오전에는 열지 않는다든지 하는 갖가지 단점을 갖고 있는 주변 다른 카페들과는 달리, 그 예쁜 카페는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아주 규칙적으로 운영되었다. 반려견 환영, 아이도 환영, 오트 밀크와 디카페인 옵션까지. 흠잡을 곳 없는 그 카페를 알게 된 후 나는 그곳에 출석하듯 방문했다. 이 카페가 마음에 든 또 한 가지 이유는 여섯 번만 채워도 무료 음료 한 잔을 제공하는 적립 쿠폰이다. 지금껏 쿠폰을 몇 개나 채웠는지 모른다. A사에 들어가기 위한 자기소개서도 이 카페에서 완성되었고, A사를 다닐 때에도 동료들을 데리고 여러 번 갔다. 그리고 A사에서 퇴사한 지금도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카페다. 그리고 또 이 카페에서 자소서를 쓴다. 가끔은 사장님이 내 얼굴을 알 텐데,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챘으려나? 하고 생각해 본다. 매일 같이 와서 혼자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리던 봄, 뜸하게 존댓말을 쓰는 관계의 사람들과 함께 와서 일 얘기를 하던 여름, 그리고 다시 오전부터 혼자 앉아 또 노트북을 두드리는 가을. 흠,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최애 카페를 잃게 되는 이유가 될지도.

 

이렇게 조금은 애매한 장점을 몇 가지 적어 보았는데, 크나큰 단점도 하나 있다. 사실 퇴사를 포함한 모든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생긴 단점이지만, 내가 사는 이 지역이 지겨워 죽겠다는 것이다. 대학 졸업반, 대학원생, 취업준비생, 사회초년생, 다시 취업준비생. 코로나 유행과 거의 동시에 시작한 자취, 한 곳에서 거의 4년을 꽉 채워 사는 동안 나는 월세로만 2,400만 원을 지불했다. 여전히 이 동네를 사랑하고 추억도 많이 깃들었지만, 이제는 이곳이 너무 지겨워졌다. 돌아갈 끝도 나갈 끝도 보이지 않아 울면서 걷던 터널과 벌써 몇 편의 자소서를 써낸 카페, 이사 갈 명분도 돈도 없어서 재계약을 이어가는 8평 원룸, 이제는 임금 체불로 기어 나와야 했던 직장까지. 이 동네에는 내 사회초년생 시기의 울적함이 모조리 박제된 채 남아 있다. 내가 4년째 머무르고 있는 이 동네 자체가 내가 4년 동안 더 나은 어떤 곳으로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상징이었다.


새로 취직도 하고 이사도 가면, 그다음에는 다시 이 동네를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려나. 그 모든 울적함도 다 추억으로 미화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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