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병아리콩
많은 직장인이 회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으로 점심시간을 고를 것이다. 나 역시 A사에서의 점심시간을 좋아했다. 업무를 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쉴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진정 원하는 방식으로 휴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러 회사의 점심시간과 마주했다. 대학교를 휴학하고 계약직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회사에서는 항상 팀원들끼리 식사했다. 물론 일정이 있으면 얼마든지 개인적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었지만, 팀장님이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얼른 모니터를 끄고 식사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같은 식당에서 비슷한 메뉴를 먹으면 팀장님이 법인카드로 점심을 결제했다. 안 먹거나 남기는 음식이 있으면 콕 집어서 이유를 물어보는 경우도 많았다. 식사 후에는 당연하게도 근처 카페로 향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아서 필요를 느끼진 못했지만, 개인행동을 하기는 싫었기에 차나 음료 메뉴를 골라 마셨고 바르게 앉아 상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맞장구쳤다.
행정 업무를 했던 전 직장에서는 월급에 소량의 식비가 포함되어 나왔다. 직원들은 각자 친한 동료들과 알아서 식사했고, 그때마다 사비를 썼다. 때문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오르는 외식비를 매일 체감했지만 좀 더 자유로웠다. 대부분 회사 사람과 약속을 잡아 점심을 먹었는데, 혼자 먹으면 소외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혼자 식사했다고 하면 ‘왜 그랬냐’, ‘같이 먹자고 하지’ 등의 말을 들었다. 약속이 없는 날에는 자리에서 간단히 먹었고, 그 외에는 약속 장소로 나가 식사했다. 다이어리는 매일 서로 다른 점심 약속으로 가득 채워졌고 점심은 곧 약속의 시간이 되었다.
그에 비해 A사의 점심시간은 무척이나 자유로웠다. 우선 시간의 제약이 없었다. 근무 시간 중 본인이 원하는 시간에 자유롭게 1시간 정도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일이 많으면 오후 2시에 밥을 먹고 와도 되고, 배가 고프면 11시 전에 나가도 됐다. 밥 먹는 시간이 제각각인 데다가 회사 인원이 적어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법인카드나 구내식당은 없었고 철저히 본인이 알아서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많은 사람이 간단히 도시락을 싸 왔으며, 회사로 식자재를 주문하기도 했다.
갓 들어온 신입이었던 나도 예외는 없었다. 12시가 가까워지자 나는 초조하게 주변을 관찰했다. 저마다의 점심시간을 누리러 하나둘 자리를 떴다. 나는 인수인계를 해 준 직원에게 알아서 밥을 먹으면 되냐고 거듭 확인한 뒤, 식사하고 오겠다고 크게 선언하고 회사 건물 밖으로 혼자 나왔다. 신입을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분위기를 내가 좋아하게 될 걸 내심 알고 있었다.
그날 점심은 지금도 기억에 뚜렷하다. 근처 식당에 들어가 소불고기와 강된장비빔밥 세트를 주문했다. 오직 나만을 위한 호화로운 점심이었다. 식당도 메뉴도 내가 선택했고 내가 먹고 싶은 만큼, 내가 먹고 싶은 속도로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식당 주변을 산책했다. 특색 없는 건물들이 늘어선 평범한 길가를 걸었는데 마음이 놀랍도록 평화롭고 이상적이라 헛헛하기까지 했다. 평일 한낮에 햇빛을 받으며 혼자 유유자적 걸어 다니다니. 특별한 목적지도 없었다. 산책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내가 최근에 산책이란 걸 한 적이 있는지 돌아봤다. 이직을 준비하던 시기에도, 다른 어떤 회사 점심시간에도 이렇게 홀로 산책한 적이 없었다. 웃음이 났다. 행복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충분한 독립성과 자유. 개성에 대한 존중. A사의 점심시간은 그 가치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점심 시간엔 모두 각자의 패턴이 있었다. 누군가는 늘 늦게 점심을 먹었고 누군가는 채식 식단을지켰다. 파프리카는 직접 요리한 간단한 도시락을 자주 먹었는데, 항상 같이 먹는 사람에게 반찬을 권했다. 올리브는 밖에 나가 수많은 식당을 탐험했고 스스로에게 충분한 휴식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샐러리는 냉동볶음밥을 많이 먹었는데, 그가 볶음밥을 해동하기 위해 돌린 전자레인지에서 나는 작동음은 점심시간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A사에는 커다란 공용 식탁이 하나 있었다. 식사 시간이 겹쳐 이곳에 둘러 앉아 같이 먹게 되면 대화를 하기도 했지만 핸드폰을 하거나 책을 읽는 등 원하는 형태로 식사했다.
나도 나름의 패턴을 만들었다. 내가 일상적으로 12시 정시에 식사하러 가서 ‘사무실 칸트’라는 재밌는 별명도 생겼다. 내가 벌떡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하면 정오라는 의미라나. 나는 되도록 밖에 나가 식사했는데, 실내에만 있으면 몸이 굳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주 가는 식당들과 좋아하는 메뉴가 생겼다. 처음 혼자 갔던 식당의 열무강된장비빔밥, 근처 한식집의 된장찌개, 거리는 좀 멀지만 가성비가 좋았던 햄버거집의 수제버거. 밥을 먹고 나면 주변 하천을 산책했다. 아기 오리들과 왜가리, 자라까지 만날 수 있는 명소였다. 때로는 카페에 눌러앉아 책을 읽기도 했다. 시간 많은 백수일 땐 하지 못했던 다양한 일을 오히려 회사 점심시간에 틈틈이 할 수 있었다.
물론 부작용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자 주변 식당도 웬만큼 다녔고, 매일 다른 메뉴를 생각하는 것도 귀찮았다. 저렴한 냉동 도시락을 종류별로 주문하여 한 주를 버티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고민이 싫지 않았다. 완벽한 점심시간이란 있을 수 없단 걸 알기 때문이다. 먹기 싫은 메뉴를 억지로 먹는 것보다는 고를 메뉴가 없다고 불평하는 게 나았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고민보다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한 고민이 값졌다. 점심시간이 내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배불리는 귀중한 시간이 될 수 있단 걸 차차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