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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Oct 13. 2023

퇴사캠프

글 올리브

문자 한 통으로 통보받은 퇴사일이었다. 우리의 요구사항도 있었지만 어쨌든 급작스러웠으니, 통보는 통보다. 에디터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기로 했고, 회사 근처 사거리까지 좀 걸었다. 쫄래쫄래 따라간 식당은 냉면이 이름난 갈빗집이었다. 냉면을 먹자고 갔는데 갈비를 주문해 주셨다. 생각지 않게 든든한 점심을 먹었다. 식사하며 다 같이 처음 나눈 생각들이 많았는데 마지막 날이라니 아쉬울 뿐이었다.


누군가 아쉬운 마음에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카페도 들르자고 했다. 길가에 그 흔한 커피 전문점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간판도 없이 이층에 딸린 북카페 같은 것이 있었다. 좁다란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도착하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우리들은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책장에 환호했다. 다정한 메모지에는 책 소개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일일이 큐레이션 하여 선별해 둔 책장이었다. 책장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사장님이 큐레이션 한 책은 환경을 생각하는 것들이 많아서 더 눈길이 갔다. 누군가의 책장을 들여다보는 일은 꽤 흥미롭다. 나랑 비슷한 취향이 있는지를 먼저 찾고, 좋아하는 책이라도 발견하면 내적 친밀감이 급격하게 상승한다. 비슷한 듯 다른 내용들을 더 쉽게 받아들이게 되고 그의 추천서를 신뢰하게 된다. 취향이란 건 이렇게 허물어진다.


처음엔 시간이 애매하여 음료를 포장해 가려고 했는데 일회용품을 지양하고 계셨다. 텀블러 없이는 포장이 안 돼서 그 핑계로 이곳에 좀 더 머물기로 했다. 커피도 직접 핸드드립으로 내려주시고 원두도 다양했다. 먹음직해 보여서 케이크는 종류별로 주문했다. 싱싱한 적포도를 서비스로 내어주셨다. 구석구석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간을 보니 온정이 많으신 분 같았다. 맛있는 한 상이 차려지고 둘러앉아 담소를 나눴다. 회의 때나 둘러앉는 긴 테이블 위에 맛있는 커피와 책이라니, 우리 회사 근처에 이런 비밀 장소가 있는 줄 몰랐다. 안락한 곳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이마를 ‘탁’ 쳤다. 회사 주변은 조용하고 소소하다. 옛 건물과 현재가 공존하고 자연이 살아있는 그런 곳이다. 이런 고즈넉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애정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점심시간을 쪼개어 동네 여기저기를 탐구했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카페에선 좀 더 개인의 취향들을 공유했다. 좋아하는 책을 고르는 안목과 취미들. 우린 일로 만난 사이여서 서로에 대해 탐구하는 시간은 없었다. 각자 직무에 따라 충실히 일하고 사적인 얘긴 잘 나누지 않았다. 어쩌다 퇴사일이 모두 맞춰지면서 우리의 처지가 같아졌고 동질감이라는 것이 우리를 연대하게 했다. 여전히 책에 대한 애정과 목표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건 마지막 날이 되니 더욱 선명했다. 잠시 얘길 나누다가 회사로 돌아갔다. 이번 달 책 작업은 끝난 상태였지만 인수인계와 개인 작업으로 반나절은 빠듯했다. 돌아가서도 정신없이 일에 집중했다. 마지막 날이라는 게 다시금 실감 났다. 우리에겐 이곳에서의 내일이 없었다.


마지막 날이라 사직서를 제출해야 했다. 어차피 같은 내용으로 같은 날 퇴사를 하는 것이라 한 사람이 양식을 만들고 인적 사항만 변경해서 다 같이 제출하기로 했다. 출판 회사다 보니 교정을 볼 때마다 인쇄를 자주 한다. 일반적으로 3교까지 본 뒤 pc교를 보다 보니 인쇄할 때면 이면지를 재활용하는 편이다. 이면지가 들어있었을 텐데 무작정 인쇄 버튼을 눌렀다. 사직서는 이면지에 인쇄가 되어 나왔다. 얼른 새 A4용지로 채우고 다시 인쇄했다. 파프리카는 뒤늦게 인쇄 버튼을 눌렀는데 A3용지로 출력했나 보다. 거기에도 물론 이면지가 들어가 있었고, 책 크기는 무조건 A3로 교정을 보느라 뒷면에 컬러 이미지가 많았는데 지난 작업을 했던 푸른색 산줄기가 인쇄되어 나왔다. 커다란 A3용지 뒷면은 온통 새파란 산이고 앞장에 조그맣게 사직서라고 쓰여있다니! 커다란 종이를 들고 A3로 나왔다고 허탈해하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 웃겼다. 사무실이 조용해서 박장대소할 순 없었고 서로 눈빛만 주고받으며 웃음을 삼켰다. 배꼽을 잡고 끅끅대느라 찔끔 눈물이 다 나왔다. 내 동료는 사직서 하나 제출하는 것도 이렇게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다 같이 사직서 제출하는 것도 기념이라며 이면지에 인쇄된 종이들과 함께 단체 사진을 남겼다. 이젠 정말 추억이 됐다.


그래도 회사에선 준비된 서류들을 잘 챙겨주셨다. 캠프 수료증 같은 짧은 경력 증명서를 받아서 들었다. 마지막 업무 시간인 오후 6시가 되었다. 평소엔 각자 퇴근 시간이 다른데, 오늘은 약간의 짐가방과 함께 다 같이 나섰다. 남아 계신 에디터분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책으로 둘러싸인 배경에 옹기종기 모여 사진을 찍고 악수했다. 졸업식 같았다. 샐러리는 출판 에디터 스쿨 같은 걸 수료한 기분이랬다. 정말 하루아침에 이게 무슨 일인지 허탈하고 웃긴 상황이었다. 오히려 다 같이 회사 문을 나서니 든든하기도 했다. 혼자였다면 이런 결정을 내리는데 또 며칠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겠지. 배웅을 받으며 아쉬움과 복잡한 마음으로 회사를 나왔다. 우리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회사와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 같은 게 종종 발생한다. 내 의지와는 다른 결정이 나를 떠밀 때도 있다. 버틴다고 달라진다면 버텨 볼 수도 있겠지만, 시간만 지체될 뿐 달라질 건 없다. 해보지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급작스러운 전개는 맞지만, 조짐은 있었다. 사소한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터져버린 것이다.


전에는 무조건 오래 참는 게 나의 인성이고 인내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래 참고만 있으면 마음이 더 쪼그라든다. 적당히 참다가 계속될 것 같다는 판단이 섰을 땐 그만하는 것이 현명하다. 상황이 변치 않으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더 이상 버티지 않았다. 버티고 버틸수록 불만과 볼멘소리가 더욱 커질 것을 알았기에 적당히 감사하고 적당히 이유를 찾았을 때 떠난 것이다. 덕분에 서로 얼굴 찌푸리지 않고 웃으며 이곳을 나올 수 있었다. 어쩐지 허전한 마음 한구석은 어쩔 수 없지만,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는 것이지. 소중한 사람들을 얻었으니 그걸로 됐다. 각종 캠프 같은 것도 결국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서 그 추억을 파먹고 서로 인연을 이어가고 동여매고 하는 것이니까. 우리들의 짧은 캠프였다고 그렇게 추억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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