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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Oct 31. 2023

월급 없는 직장생활

글 올리브

첫 달은 적응기와 함께 정신없이 마감 작업을 했다. 출판학교에서 익힌 기술을 실무에 적용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터라 배움의 기억을 더듬으며 하나하나 문제 해결해 가는 재미가 있었다. 드디어 연습이 아닌 실전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에 성취감이 쭉쭉 올랐다.


정해진 마감 기한, 인쇄 날짜가 눈앞에 있었다. 동기부여가 되니 자발적 야근을 했고, 집에 늦게 들어가도 스스로 정해둔 오늘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뿌듯함이 남았다. 원팀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책임감이 커져만 갔다. 게다가 인쇄를 넘기는 최종본이 내 손에서 이뤄지다 보니 더욱 그랬다. 처음 마감 날은 비가 억수로 내렸다. 이곳저곳에서 물난리 소식도 있었다. 우리 회사는 그날 누전으로 전기가 차단됐다. 디자이너의 숙명인 저장 버튼은 수시로 눌러주지만 약간의 작업을 하고 있던 순간에 화면이 새카매졌다. 동시에 내 눈앞도 캄캄했다. 몇 분 후 차단기가 올라갔고 재부팅으로 몇 시간을 날렸다. 착잡했던 시간도 어떻게 흘러갔다. 


매달 초는 월급날이었다. 첫 달에 하루가 밀렸을 땐 사기업이니 그러려니 했다. 출판사의 현실을 익히 들었고 공기업이나 규모 있는 곳이 아니니까 하루 이틀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개의치 않고 또 열심히 다음 작업을 위해 일했다. 첫 작업을 급하게 마무리하면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터라 다음 작업은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 같이 모여 작업 후 피드백 회의를 통해서 개선 사항을 점검했고 메모장에 적어두었다. 작업할 때마다 스스로 꼼꼼히 확인하고 집에서 따로 pc 교를 돌려보기도 했다. 여름휴가도 있었다. 열심히 노력한 만큼 푹 쉬고 올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서 그저 행복하고 감사했다. 중간에 사내 외주 작업도 했고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냥 즐거웠다.


한 달을 꽉 채우고 다음 달 급여일은 조금 기대가 됐다. 이번엔 제날짜에 맞춰주시려니 기대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삼일.. 슬슬 불안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슬쩍 월급 들어왔느냐고 물어봤다. 다들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일주일이 지났고 그때도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대표님은 미안한 기색을 표하며 계약금 선지급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어 들어올 때까지 조금 기다려달랬다. 그 말을 믿고 계속 기다렸다. 일단 일이 너무 재밌었고 밀리더라도 언젠가 주실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슬슬 사내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여기저기서 항의 전화가 걸려 왔고, 인쇄소 사장님은 매일 같이 회사에 찾아왔다. 대표님은 언제부턴가 회사에 보이지 않았다. 외부 미팅을 오가느라 바쁘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표님과 연락이 잘 안 되는 그때부터 불안함이 밀려왔다.


사건의 발단은 에디터 한 명의 해고로부터 시작됐다. 휴가를 다녀오니 한 분이 퇴사했다. 시니어였던 그분은 남아있는 우리에게 여러 회사 다녀봤지만 월급이 밀리는 회사는 아니라며 조심스레 이직을 추천하고 회사를 나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직 생각은 없었다.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고 대표님이 계약 건만 잘 해결되면 괜찮을 거라고 했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썩은 동아줄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줄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은 신입에겐 밀리는 월급보다 경력 한 줄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이 일이 너무 재밌었다. 좋아하는 일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이 발목을 잡는 것이라 했던가. 당장 적금을 깨지 않고는 생활비가 없었다. 마침 다음 달 월급날 다음날에 만기 적금이 있었다. 그때 까지라면 얼마는 더 버틸 수 있었다. 이런저런 타협을 하며 통장 잔고와 커리어를 저울질해야 했다. 혹자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나가기 더 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원하는 직무와 원하는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나는 건 정말 쉽지 않다. 나에겐 그 모든 게 충족되고 있었으므로 월급이 밀리는 건 뒷순위였다. 


어느덧 월급이 한 달 반째 밀린 상황이 되었다. 선 계약금을 받는다던 그 건도 무산된 것 같았다. 월급은 언제 준다는 기약도 없었다. 조금씩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는 슬슬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출근을 안 하시니 직접 얼굴을 마주할 수도 없었고 누굴 찾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대표님께 다음 달 월급은 밀리지 않게 해달라고 호소하며 문자를 남겼다. 답변은 노력하고 있다는 모호함으로 끝났다. 그저 묵묵히 출근하고 일하고 회사의 상황만을 눈치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물가는 점점 올랐고 줄일 수 있는 건 식비뿐이었다. 가끔 엄마에게 도시락을 싸달라고 요청했고 편의점 간식으로 때울 때도 생겼다. 내게 점심은 회사 근처 맛집을 찾아 행복한 한 끼를 먹는 나를 위한 선물 같은 것이었는데, 문득 이렇게 버티는 게 맞을까 고민이 되었다. 두 달 치 월급까지만 상황을 보자고 할 때쯤, 또 다른 에디터의 타사 면접 일정이 잡히면서 이번 달 작업을 마치고 나가는 쪽으로 이상하게 얘기가 흘러갔다. 중추 역할을 하는 에디터라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저 휴가만 주면 되는 것을 퇴사까지 얘기가 됐다는 게! 그때는 모두가 너무 당혹스러워서 직원을 잡지 않는 회사가 엉망이라고 생각했다. 책 한 권 만들어 내는 것에 직원 한 사람의 수고가 얼마나 큰지 회사는 모르는 듯했다. 내가 실망한 건 이 포인트였다. 마감 당일에 원고를 던져주고 사진을 오후 느지막이 구해와도 괜찮은 퀄리티의 책을 만들어 내는 것에 죄책감이 없어 보였다. 능력이 없는 것은 이해하지만 책에 대한 태도는 참을 수 없었다.


하나둘 탈출 시도를 했고 마무리와 인수인계서를 작성하고 모든 직원이 그만두는 것으로 문자 통보를 받았다. 문자라니. 이런 회사에서 나는 무얼 기대했던 것일까. 말끔히 두 달 치 월급이 밀렸고 우린 집단 퇴사를 했다. 노동청에서 간이대지급금을 받는 것만이 월급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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