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로 책방 여행하기.
스무 살, 내일로의 마지막 코스로 바쁘게 들렸던 부산. 마지막 여행지어서 아쉽고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다시 오리라 마음먹은 것이 벌써 7년. 여름 방학 찬스로 7년 만에 두 번째 부산에 왔다. 내 책을 입고한 독립 책방을 투어 하는 게 오랜 꿈이었는데, 정말 이뤘다. 선물 같은 여름 방학, 꿈만 같다. 책방을 위한 여행인 듯 하지만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여행이면서 결국 힐링 여행이었다.
아침 일찍 서두를 일이 전혀 없었지만 오전 10시 비행기로 부지런히 왔다. 단순히 입고한 김해 책방 오픈 시간이 11시라는 것을 보고 그 시간에 맞췄다. 친구는 휴가는 아니고 탄력근무를 하는데 마감할 일을 끝내고 저녁쯤 부산으로 오기로 했다. 덕분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방을, 골목을, 카페를 내 속도대로 천천히 맘껏 여행할 수 있었다. 김해공항에 내려서 곧장 행한 곳은 김해 동네책방, 페브레로.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동네처럼 사장님은 생각보다 차분하고 수줍음이 많으셨다. 갑자기 찾아가서 살짝 놀라기도 하셨는데 연필꽂이에 있던 네임펜을 가져오시더니 책에 싸인을 부탁하셨다. 싸인이 없어서 짧은 메시지와 이름을 남기고 왔다. 섬세하게 배려하시는 모습에 어찌나 감동을 주시는지. 주실게 커피뿐이라며 정성스럽게 타 주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미키마우스 모양의 귀여운 컵에 간식까지 예쁘게 담아주셨다. 컵에는 빨대 입구 부분만 비닐 포장지가 씌워져 있었다. 평화로운 그 공간을 천천히 오래 둘러보고 싶었지만 공항에서 곧장 달려와서 나에겐 말 그대로 짐이 있었다. 지내역에 열 체크해주시는 분께 잠시 캐리어를 맡기고 온터라 금방 일어나야 했다. 차가운 커피였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입천장이 다 까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급하게 커피를 마시고 같은 시각 내 짐을 우두커니 서서 지키고 계실 그분께 커피 한 잔을 드리려고 포장을 했다. 이마저도 그냥 주신다길래 극구 거절하여 계산을 하고 왔다. 작가라는 이름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감사히 여겨주시는 걸까. 입고해주신 것만으로도, 내 책을 위해 어느 한 켠을 내어주신 것으로 내가 더 감사한데.. 책방을 뒤로하고 역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나를 알아보시더니 짐을 무사히 건네주셨다. 감사한 마음을 커피 한 잔으로 대신했다. 김해는 처음 왔는데 친절함이 가득한 이곳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경전철을 타고 서면으로 갔다. 숙소는 광안리였는데 중간지점인 서면에서 친구와 보기로 하여 일단 이 커다란 짐을 맡길 짐 보관소를 찾았다. 서면에 아는 선생님이 사시는데 짐은 롯*백화점에서 무료로 맡길 수 있다기에 찾아갔다. 짐 보관소는 B2층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푸드코트가 있는 공간이었다. 맛있는 음식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유독 긴 줄로 대기하며 눈을 반짝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크로플 맛집인가 보다. 요즘 크로와상과 와플의 조합인 크로플이 인기던데! 늘 궁금했다. 책방을 들리느라 점심도 거르고 정신없이 부산으로 넘어왔을 때였고 배에서도 신호가 왔다! 짐을 맡기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까 찜해놓았던 크로플집에 줄을 섰다. 뜨끈하게 갓 구운 플레인 크로플 하나를 포장해서 자리를 찾았다. 로비 중앙에 마치 운동경기를 구경하는 스탠딩석처럼 테이블도 하나씩, 충전기까지 구비되어 있는 아주 훌륭한 공용 테이블석이 있었다. 마침 자리가 났길래 그곳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습관처럼 메일을 확인하는데 한 책방에서 연락처를 물어보는 메일이 왔다.
‘작가님..’으로 시작하는 메일을 열어보는 기막힌 타이밍. 찾아가면 주변 맛집도 알려드리겠다는 답변에 씽긋 웃었다. 난 지금 작가라는 이름이 좋은 걸까. 유머스러운 농담이 좋은 걸까. 잠시 쉬면서 먹은 크로플은 정말,, 겉바속촉. 식감도 맛도 모두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었다. 너무 맛있어서 눈이 번쩍, 상호명이 무엇이었는지 겉 봉지를 확인했다. 다음에 기억했다가 또 와야지.(찾아보니 부산에만 있는 지점이라.. 다음에 또 부산에 가야겠다.) 서면에서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는 곧장 한 봉지를 해치우고 자리를 일어섰다. 두 번째 책방에 들려야 하기 때문! 또 좋아하는 골목 책방이 있다기에, 근처 시장에서 유명한 떡볶이집이 있다기에 가야 할 이유들이 3가지나 있었다.
역으로 가도 됐지만 버스를 타고 조금 돌아갔다. 천천히 가면서 책을 읽고 싶었기 때문에. 인천에서부터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책을 들고 왔다. 오고 가는 길에 읽으려고. 요즘 나의 관심사는 '슬픔'이다. 우울한 일이 있어서는 아니고. 진정한 기쁨은 슬픔 덕분에 알 수 있다는 걸 많이 깨닫고 있는 요즘이라 관심을 두게 되었다. 회색빛의 사진으로 되어있는 표지에는 현광 주황색의 제목과 눈물을 뜻하는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다. 전체적인 조화가 너무 맘에 들었다. 사실 외국 소설은 늘 그렇듯 이름들이 낯설어서 등장인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게 꽤 시간이 걸리는데 이 소설은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서 금방 적응할 수 있다. 어느 정도 관계도가 그려지고 소설에 점점 빠져들어갈 때쯤이었다. 내려야 할 정류장에 다 와갔다. 시장에 내려서 그렇게 유명하다는 떡볶이 집을 찾았다. 역시나 나처럼 소문을 듣고 몰려온 관광객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있었다. 혼자여서 그랬을까. 다들 커플이나 가족, 친구들과 와서 이것저것 주문해 먹는데 혼자서 튀김 세트를 받아서 벽을 보며 먹는 맛이라 그랬는지 내 입맛엔 고추장 맛만 나고 자극적이게 느껴졌다. 결국 반 정도 먹고 남겨버렸다. 떡볶이를 정말 좋아하는 나인데.. 떡볶이를 남기다니!! 시장 골목은 비좁고 유난히 더웠다. 얼른 그곳을 빠져나왔다.
신호등을 사이에 두고 길 건너편은 책방골목으로 이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느낌. 옛날 느낌 그대로. 동인천의 배다리 헌책방이랑 똑 닮아 있었다. 헌책들을 사고파는 서점들을 천천히 구경하고는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그러다가 흰색 레이스 커튼이 흐드러져있는 예쁜 책방을 발견했다. ‘어..? 여기다. 내가 오려고 했던 입고한 책방.’ 딸랑 종소리가 들리고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책방 대표님이 앉아계셨다. 엔틱한 분위기와 은은하게 사방을 꾸며놓으신 것이 내 맘에 쏙 들었다. 당연하게도 나의 책이 잘 있는지 궁금했다. 두리번거리며 찾아낸 책은 나무 탁자 위에 예쁘게 올려져 있었다. 여기서 보니 더욱 반가운 나의 책. 한 번 쓰윽 펼쳐보고 쑥스러워 괜히 다른 책들을 뒤적였다. 천천히 이 공간을 오래 보고 싶어서 가방도 잠시 내려놓고는 다른 작가 분들의 책들도 내 책처럼 소중하게 살펴본다. 이곳저곳 꼼꼼하게 둘러보다가 놀라웠던 것은 타자기 위에 놓인 책방 대표님의 책장 컬렉션. 내가 요즘 빠져있는 '슬픔'의 주제들이 많이 보였다. 책의 취향까지 같다니 가슴이 콩닥거렸다. 눈여겨보고 있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우는 어른>이라는 책을 데려왔다. 너무 좋아하는 작가이면서 요즘 내가 다루고 싶은 주제여서 더욱 마음이 갔다. 대표님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고 와줘서 감사하다는 말들이 오고 갔다. 책을 예쁘게 포장해주셨고 손거울까지 챙겨주셨다. 가는 길까지 따뜻한 배웅을 받았다.
예쁘게 포장해주신 책을 꼭 받아 안고서 마음 든든하게 카페로 향했다. 마치 특별한 일정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미리 서치 해두었던 책방 근처 카페였다. 보수동 책방 골목에 근사한 개인 카페가 있다기에 한껏 기대를 했다. 기대하면 실망이 크다던데.. 웬걸, 기대한 것보다 훨씬 좋았다. 원목의 탁자와 의자. 우드톤. 통유리로 된 창밖을 바라보게 일렬로 이루어진 테이블 배치도 맘에 들고. 잔잔하게 흐르는 팝송과 따뜻한 색의 조명이 내려앉은 분위기, 거기에 맛있는 커피와 센스 있는 각설탕, 손수 만드신다는 멜론에 충실한 멜론 케이크까지..
‘아, 나는 너무 행복하다.’
이 말이 절로 나왔다. 분위기까지 완벽하게 어우러진 이 곳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글을 쓰는 이 시간이 정말 만족스러웠다. 창 밖은 좋아하는 책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골목이었고 그 배경으로 연인, 친구, 가족들이 잠시 머물다 갔다. 오늘을 추억하려고 예쁘게 서로의 모습을 담아주려 애쓰는 마음들이 흐뭇한 미소를 짓게 했다. 유리 안쪽에선 마음껏 여유 부리며 책을 읽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문득 드로잉으로 남기고 싶었다. 종이가 없어 급한 대로 크라프트 재질의 책 포장지 위에 그린 화분 드로잉. 정말이지 작가라는 이름에 걸맞은 아주 완벽한 하루였다.
사실 내가 작가인 건 아무도 모른다. 작가라고 하기에 단출한 작품, 스스로도 이렇게 불러도 되는지 아리송하다. 당연히 책방 대표님들도 내가 들어갔을 때 전혀 알아보시지 못한다.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 이 책을 쓴 작가인데요.."라고 주저하는 목소리를 내면 그제야 "작가님!!"이라고 활짝 웃으며 불러주신다. 주고받은 메일 속에서만 알아보는 무명작가지만, 오늘은 왠지 작가라는 이름을 메일이 아닌 현실에서 듣고 두 세 사람에게 들을 수 있어서 혼자 뿌듯했다.
작가라는 이름은 작품이 있을 때 불려질 수 있고, 독자가 있을 때 의미가 있다. 그래서인지 스스로 작품이란 걸 만들지만, 많은 사람에게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까지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그런 숙명을 알기에 오늘 불린 두 세 사람의 부름이 너무도 값지게 들렸다. 나에겐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 하루인 것이다. 쑥스럽지만 이 이름을 오래도록 불리고 싶다. 앞으론 두 세 사람을 넘어서서 더 많이 더 오래.. 그러기 위해 매일 조금씩 글을 쓰고, 나부터 좋은 독자가 되고 이전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