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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진 Feb 23. 2022

나를 구제하다 中

2012년 봄, 퓨전 패밀리 레스토랑 홀서빙



  첫 출근 날에는 오히려 담담했다. 그쪽에서 나를 불렀으니 적어도 내가 적응하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편의를 봐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출근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완전히 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인사할 겨를도 없이 나는 전채요리를 준비하는 포지션으로 배정되었다. 위생팩에 고구마, 감자, 옥수수를 하나씩 넣어 포장하는 일이었는데 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잠시 뒤 나타난 언니가 불호령을 내렸다. “너 어느 세월에 다 할래? 안 되겠다. 너 나와. 얘랑 바꿔.” 나는 얼떨결에 누군가에게 하던 일을 넘겨주고 엑스포로 내려왔다.


  엑스포는 주방과 홀의 중간 지점을 지칭했다. 음료나 소스를 만들고, 주문대로 요리가 나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홀에서 필요한 모든 물품을 미리 채워두어야 했고, 주방에서 전달되는 지시 사항을 소통해야했다. 언니는 발산점 홀매니저로 엑스포를 총괄 담당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엑스포로 불려온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있다고 생각했는데, 언니는 어쩐지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그때부터는 혼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거 채워, 저거 만들어, 빨리빨리 해, 워크인-창고 크기의 냉장고- 갔다 와, 핸들링 해, 더 빨리 못 해?……. 해도해도 일은 끝이 없었고, 매번 느리다고 혼이 났다.


  그 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견뎠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언니가 시키는대로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밤이 찾아왔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 좋았다. 초반에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계속 혼이 나니 창피하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조차 사치로 여겨질 정도로 언니가 나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일한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바쁘게 쓰레기 마감을 하고 있었다. 쓰레기 마감은 하루동안 홀과 주방에서 배출된 쓰레기들을 모아 봉투별로 최대한 꽉꽉 눌러 밟은 후 폐기물용 엘리베이터에 던져넣어야 하는 일이었다. 위험하고, 힘도 필요했기 때문에 보통은 남자들이 하는 일이었지만 나는 언니가 시켰으니 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매일 쓰레기 마감을 했다. 열심히 쓰레기 봉투를 밟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안 힘드세요?”

  “네?”

  “매니저님 좀 너무한 거 같아요. 맨날 혼내고…… 그 쪽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 같긴 해요. 근데 전 괜찮아요.”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고, 그 사람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자리를 떠났다. 종종 언니에게 서운한 기분이 들 때는 있었지만, 막상 누군가의 입으로 들으니 더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별 거 아닌 일로 혼이 날 때마다 억울하면서도 동시에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언니는 나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만두는 것을 나약하게 도망치는 것으로 여겼고, 밟을수록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매일 구박을 받아서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나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늘 엑스포에서 혼이 났으니, 주방에서도 그 모습을 안 볼 수가 없었다. 보통 주방 사람들은 매우 거칠어서 홀 직원들과 트러블이 많았다. 주문과 다르게 요리가 나갔다거나 뭔가 특이한 주문사항이 있을 때마다 주방에서는 크게 화를 냈다. 그런데 내가 뭔가를 부탁할 때는 별다른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농담이나 시덥잖은 얘기를 걸어올 때도 있었다. 주방 사람들과 사이가 좋으니, 홀에서 일하는 것이 수월해지기 시작했다.


  홀 서빙하는 사람들은 매일 오전에 모여 팀을 짰다. 몇 개의 테이블을 모아 하나의 섹션이라고 불렀고, 섹션별로 두 명씩 서빙을 담당하는 직원(서버)이 있었다. 섹션이 정해지면 무전기를 찼다. 무전에 대고 하는 말은 같은 팀 뿐만 아니라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때문에 섹션별 팀웍이나 현재 상황이 전체에게 공유되었다. 간혹 “재영씨, 이거 안 챙겼어요?”라든가 “매니저님, 3번 섹션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와 같이 예민한 대화가 오고 가기도 했다. 나는 매일 엑스포에서 혼나느니 홀에 있는 편이 훨씬 좋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다. 엑스포로 들어가지 않는 방법은 단 하나, 섹션에서 같이 일하고픈 사람이 되는 것뿐이었다. 실제로 이미 온갖 훈련에 단련됐기 때문인지 섹션을 맡는 것은 수월했다. 나와 같은 섹션에 배정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뻐하며 손뼉을 마주쳐 왔다.


  “너, 잠깐 와 봐.”

  “응?”

  “내일부터 너 엑스포 오픈 들어 가.”

  “뭐라고?”


  어느 날, 난데없는 언니의 말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엑스포 오픈’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루 영업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빠짐없이 챙기고 준비해야하는 막중한 임무라 홀매니저 외에는 아무도 그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깜짝 놀라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다. 아무리 그간 내가 시키는 일에 불만없이 했기로서니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하라면 해. 따라 와.” 언니는 나를 데리고 윗층으로 향했다. 워크인부터 시작해 차례대로 이동하며 하나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엑스포 오픈’의 업무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일단 워크인(창고만한 커다란 냉장고)에서 필요한 것을 챙겨 내려와 손님들에게 나갈 물(메밀차를 포함해 세 가지 종류가 있었고, 매일 바꿔야 했다.)을 끓이고, 전채 요리를 포션(준비)하여 온장고에 넣어두고, 불고기 소스를 만들어 얼음물에 받쳐놓고, 계절쥬스(여름에는 수박, 겨울에는 딸기) 과일을 조각내어 포션하고, 식기 상태를 확인하여 필요시 핸들링을 마무리하고, 찬부(반찬을 푸는 직원으로, 보통 주방 막내)에게 이야기하여 찬을 준비하고, 끓여놓은 물을 물통에 소분하여 담은 후 목걸이를 채워 홀로 내보내야 했다.

 

  그 모든 일을 오픈 전에 마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엑스포에 서서 요리가 주문대로 잘 나가고 있는지 확인해야했다. 이 과정에서 주방과 홀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한 소스나 음료, 전채요리 등 홀에서 필요한 것들을 채워넣고, 식판이며 와인잔이며 특별한 상황도 챙겨야 했다. 런치 혹은 디너 타임을 하나의 공연으로 본다면 그 시간동안 무리없이 잘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엑스포의 역할이었고, 따지자면 ‘무대감독’ 정도가 될 것이다.


  나는 도저히 ‘엑스포’를 맡을 자신이 없었다. 그것도 당장 내일부터라니 황당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언니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덤덤한 표정이었다.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나는 속이 타들어갔다. 조금 편해질만 하니 또 나를 괴롭힐 구실을 찾아낸걸까. 도대체 언니는 나를 왜 이곳으로 부른걸까.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나는 다음날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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