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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진 Feb 23. 2022

나를 구제하다 下

2012년 여름에서 가을, 퓨전 패밀리 레스토랑 홀서빙



  나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지하철에 올라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들을 그려보았다. 한 가지라도 빼먹거나 늦어진다면 런치 타임에 차질이 생기고, 나쁜 경우 컴플레인이 들어올 수도 있었다. <불고기 브라더스>는 대체로 가격대가 높은 편이라 손님들이 서비스나 품질에 대해 거는 기대가 많았다. 전채요리부터 시작해 디저트에 이르는 식사를 물 흐르듯 대접하려면 준비가 완벽해야 하는데, 뭔가 예상대로 되지 않아 난처해하는 내 모습이 자꾸 머릿속에 그려져 괴로웠다. 심장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매장에 들어갔더니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나는 불을 켜고, 워크인으로 올라가 ‘오늘의 차’와 과일, 전채요리 등 필요한 것들을 챙겨 내려왔다. 그리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마감되어있는 음료기, 제빙기, 조리대 등을 직원들이 쓸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놓고 수박을 가르기 시작했다. 주방 매니저가 들어와 흠칫 놀라길래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오늘 엑오(엑스포 오픈) 너야?”

  “네.”

  “별일이네.”

  “매니저님, 육수 별로 없어서 만들어야 될 거 같아요.”

  “워크인 확인했어?”

  “네.”

  “알았어.”


  주방 매니저는 앞치마를 입고 전날 꺼내놓은 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수박 손질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키위나 딸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귀찮아서 다들 수박 주스 시즌을 싫어할 정도였다. 일단 수박의 두꺼운 껍질을 다 제거했다. 그리고 적당한 크기로 조각낸 후, 칼끝으로 씨를 일일이 제거하고 위생팩에 150g씩 넣어야 했다. 나는 틈날 때마다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일은 많은데 별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홀 오픈을 담당하는 오빠가 출근하자마자 나는 오빠를 불렀다.


  “오빠, 내가 저기 물 끓여놨거든? 물통에 부어서 갖고 나가면 돼.”

  “나 청소해야 되는데?”

  “늦었어. 이러다가 런치에 물 못 나가. 애들한테 쓰레기만 좀 주우라고 해.”

  “알았어.”

  “물통 목걸이도 바꿔야 돼. 알지?”

  “오늘의 차 뭐지?”

  “옥수수.”

  

  한 명씩 출근할 때마다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업무를 나눠주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이것부터 해야 돼,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오픈 시간이 가까워졌다. 차분히 머릿속으로 빠진 것은 없는지 생각해 보았다. 얼추 생각해놓은 일들은 다 한 것 같았다. 홀 직원 한 명이 무전기를 들고 왔다. 나는 무전기를 받아 엑스포 위에 놓았다. 홀 직원들은 이어마이크를 착용했지만, 엑스포에서는 주방 직원들도 함께 들을 수 있도록 소리가 밖으로 들리게 해두어야 했다.


  “오픈 손님 들어갑니다.”


  무전이 흘러나오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첫 주문이 들어오고, 나는 그 주문을 엑스포 위에 붙였다. 잠시 후, 홀 직원 한 명이 엑스포로 들어와 전채요리를 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의 죽’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아차, 싶었지만 얼른 주방 안쪽에 끓여놓은 죽을 가져와 죽통에다 부었다. 그 이후로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주방에서 요리가 나올 때마다 주문서와 맞는지 체크한 후 홀 직원에게 전달했고, 재고가 없으니 받지 말라고 한 메뉴들을 무전에 대고 한 번 더 공지했다.


  런치 타임에 손님이 별로 없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브레이크 타임이 되자 언니가 출근했다. 언니에게 섭섭한 마음이 앞섰지만, 내심 별 탈 없이 엑스포 오픈을 해낸 것에 대해 칭찬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언니는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나는 애써 기대감을 감추며 따라 나갔다.


  “너 워크인 확인했어?”

  “뭐?”

  “아침에 육수 만들어달라고 하기 전에 워크인 확인했냐고.”

  “어, 했는데?”

  “야채 박스 안쪽에 육수 한 통 있었대.”

  “주방 매니저님이 그래? 어떡해. 엄청 화나셨겠네?”

  “됐어. 다음부터는 확인 잘 해.”


  그 말만을 남기고 언니는 자리를 떴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태산 같은 주방에서 이런 실수를 예사로 넘겼을 리 없었다. 눈으로 보지 않았어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불만을 토해내는 주방 매니저에게 언니는 “처음인데 그냥 좀 넘어가!”하고 외려 큰소리를 쳤을 것이고, 오랜 기간 함께 고생한 사이였으니 주방 매니저도 잠깐 투덜거리다 넘어갔을 것이다.


  언니가 나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내가 받아온 갖은 핍박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지만, 어쩌면 언니가 나에게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점이 나를 두렵게 했다. 연민도 변명도 통하지 않았고, 오로지 머릿속에 ‘일’ 밖에는 없었다. 그런 언니가 실수를 감싸주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엑스포 오픈’을 했다. 조금 지나자 ‘엑스포 마감’까지 맡게 되어 홀에서는 제일 중요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풀 타이머의 신분으로 정직원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매장 측에서도 대안이 없었는지 한동안 나에게 엑스포를 맡겨놓았다. 그리고 틈날 때마다 정직원 제의를 했다. 마치 일 잘하는 일반 사병에게 군대에 말뚝 박으라고 하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점점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발산점에서 일을 한 지도 열 달 남짓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당시 이사를 하여 독립문에 살고 있었는데, 마감을 하고 날씨가 좋으면 집까지 걸어가고는 했다.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음악을 들으며 서울의 밤 거리를 걸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무슨 힘이 남아 그랬을까, 싶지만 솔직히 6개월쯤 지나자 몸이 적응을 한 덕분인지 크게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걷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절대 그 생활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마음 속에서 고등학교 때 그만둔 연극에 대한 꿈이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매일 혹독하게 일하고, 어마어마한 거리를 걸어서인지 살도 많이 빠져있었다. 처음 입고 갔던 88사이즈의 바지는 버린 지 오래였고, 원래 있던 옷도 너무 커지는 바람에 작은 사이즈를 새로 사야 했다. 몸이 건강해지고, 일이 안정되니 비로소 꿈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가고 싶었던 대학교를 다시금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니가 다른 매장으로 떠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지막 출근 날, 언니는 한 명 한 명 찾아가 인사를 했다.


  “너 잘 해. 알았냐?”

  “언니나 가서 잘 해. 울지 말고.”

  “어쭈, 이게 많이 컸네.”

  “나 원래 언니보다 훨씬 컸어.”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고마워, 라는 말이 왠지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언니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는 이곳에 와서 완전히 달라졌다. 여기서 보낸 시간들이 나를 살렸다고 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언니는 자신이 원룸 속에서 죽어가던 누군가를 구제했다는 사실을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단순하고 강렬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의심 없이 따라갈 수 있었다. 실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언니가 떠나자, 내가 그 매장에 남아있을 이유도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모아둔 돈으로 다시 입시 준비를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매장측에서는 점차 내 시프트(일하는 시간)을 줄여가기 시작했다. 내가 계속 일하기를 바랐던 오빠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 오빠가 새로온 홀매니저에게 내가 일하는 시간을 늘려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나는 오빠를 바깥으로 불렀다.


  “오빠, 나 그만둘 거야.”

  “왜, 또. 내가 잘 말하고 있어.”

  “나 이제 입시 준비할 거야. 그러니까 진짜 말 안 해줘도 돼.”

  “대학? 너 대학 졸업했잖아.”

  “다시 연극하고 싶어서.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


  오빠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길로 매니저를 찾아가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길고 다사다난했던 내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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