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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진 Mar 27. 2022

정리의 미학

2014년 봄에서 여름, 연극 연출 전공



  2학년 1학기를 마칠 때쯤 나는 거의 초주검 상태였다. 일단 학회를 하고 있었고, 동아리에서는 창작극 연출을 하고, 제작반에서는 연기를 하고, 연출실기에서는 연기와 연출을 병행하고, 실음과와 문창과 제작 수업까지 듣는 바람에 거의 매일 밤을 샜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헤르미온느에 버금가는 스케쥴이었다. 어찌나 시간이 없었는지 연출실기 모임은 거의 새벽이  되어서야 시작할  있었다. 때때로 아주머니들이 청소를 시작하시는 꼭두새벽에 복도에서 동선을 맞춰보기도 했다. 동시에 나는 예민회에 들어갔다. 1학년  학교를 다니며 예민회 공연에 반해 2학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들어간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예민회는 ‘예대민속연구회 줄임말로 학교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탈춤 동아리였다. 담당 교수님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봉산탈춤 권위자셨고, 봉산탈춤 보존회에 들어간 선배들도 있었다. 학기 중에는 중앙계단에 모여 매일 아침 트레이닝을 받았고, 거기서 버틴 인원들은 본격적인 여름 트레이닝을 해야했다.


  울고 싶은 심정으로 겨우 2학년 1학기를 마친 후, 뼈저리게 후회했다. 동기들보다 조금 많은 나이라고는 하나 연극 작업 경험도 많지 않은 상태에서 의욕만으로 저지른 수많은 일들이 버거웠다. 여름방학에 찬찬히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예민회 여름 트레이닝은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스튜디오에 나가 기마자세로 서너 시간을 버텨야했다. 선배들은 허벅지 위에 뭔가를 올려놓기도 하고, 장구 장단에 맞춰 앉았다 일어서는 ‘굴신’을 넘어질 때까지 시키기도 했다. 땀이 바닥에 흥건하게 고였다. 잠깐 쉬는 시간이 주어질때마다 정수기로 달려가 물을 마셨다. 또한 구토가 올라와 트레이닝 기간에는 중국 음식처럼 자극적이고 짠 것은 먹을 수가 없었다. 한 동기는 무릎이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무릎 연골이 거의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트레이닝은 계속되었다. 하루의 트레이닝을 마치고나면 공연용 탈을 만들거나 하루걸러 한 번씩 찾아오는 높은 기수 선배들과 막걸리를 마셨다.


  나는 이를 악 물고 트레이닝에 임했다. 여름 트레이닝이 끝나고 살아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열 명 정도였다. 트레이닝이 끝난 것을 기념하고, 공연에서 맡을 역할을 정하고자 우리는 대부도로 단합대회를 떠났다. 제일 힘든 수련을 잘 마쳤다고 막걸리를 따라주는 선배들을 보며 나는 왠지 두려워졌다. 역할이 정해지고나면 매 공연과 연습에 엄청난 시간이 쓰이게 된다는 것, 나이가 제일 많은 내가 뭔가 직책을 맡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두 가지가 나를 계속 불안하게했다. 예민회는 학교에서 ‘예민회 전공’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것을 모르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으나, 직접 눈으로 보고나니 현실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졸업 후에도 교수님이 부르거나 공연에 필요하면 참여해야하는 상황이 많았다.


  사력을 다하는 것보다 그만두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그 집단에 있는 동안 해 왔던 모든 다짐을 배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상태로 2학년 2학기를 맞이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여름방학 전, 학회는 그만둔 상태였다. 선배들은 내가 부학회장을 맡아주길 바랐지만 나는 군대식 문화에 완전히 넌더리가 났고,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예민회는 단합대회를 다녀온 직후 그만두었다. 가장 힘든 훈련을 마치고 나가겠다는 나를 선배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로서는 더없이 타당한 일이었으므로 남들의 시선은 상관없었다.


  얼추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극작과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자신이 쓴 졸업 작품 연출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고, 작가와 연출이 팀을 이뤄 프리젠테이션을 해야했다. 여덟 팀 중 네 팀을 선정하여 무대화의 기회를 주는 프로젝트였다. 나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어떤 것을 정리하고, 어떤 것을 취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연극이었다. 나는 일단 친구의 글을 읽어보았다. 시인이 되고싶은 중년 여성의 이야기였다. 마음을 울리는 시와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하겠다고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우리는 다행히 네 팀 안에 들어갔다.


  기쁘기도 했지만, 여러 수업을 들으며 연극 연출을 해야하는 괴로움을 겪어봤기 때문에 나는 겁이 났다. 그래도 동아리와 학회를 정리했으니 예전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마음을 다잡았다. 2학기 등록을 하려는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직전 학기까지만 해도 백만원이 넘게 나왔던 국가장학금이 전혀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국가장학재단에 문의를 해보니, 부모님의 소득이 많이 책정되어 그런 것이라고 했다. 일단 아빠가 회사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되었고, 엄마가 선거운동원으로 급여를 받은 것이 문제였다. 특정 월의 소득을 열 두 달로 곱하여 소득을 책정하는 방식 자체가 어이가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민원을 넣어도 당장 해결될 리 없었다. 나는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길로 휴학계를 냈다. 연출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한 학기에 주어지는 학생 연출 자리가 몇 개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많은 연출전공 학생들이 연출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졸업하는 상황에서 하물며 청강생이 그 자리를 맡는 것에 대해 작은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프리젠테이션에서 뽑혔고, 또 사정상 등록을 못하게 된 것이 인정되어 무사히 넘어갔다. 나는 그때 이제 제대로 시작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길로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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