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노을

#6. 산 토리니 2014 (2)

by 스토리텔러

고3 무렵 우연한 계기로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는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소설로 남아있다. 저녁을 먹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한 권을 다 읽었고, 새벽 1시쯤 여운을 이기지 못해 그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그리고는 새벽 5시에 울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잠든 기억이 있다. 열아홉 살의 나에게 그 책이 주는 감정의 요동침은 너무 버거웠다. 한 번도 상실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와타나베의 상실을 공감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괴로워했던 것 같다. 나이를 먹어가며 그 실마리를 조금은 잡아갔지만 머릿속에 항상 품어오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하루키는 어떻게 이런 감정을 느끼며 책을 쓸 수 있었을까?'. 나는 그 답을 5년이 지난 2014년, 산토리니의 이아 마을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무지개로 시작한 하루


어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아침에도 계속됐다. 동행 자매분들은 아침 일찍 차를 렌트해서 섬을 돌아다니겠다고 하셨다. 한국에서부터 미리 예약을 하셨는지, 렌터카 회사에서 사람이 찾아와 그분들에게 차를 전달해주셨다. 숙소를 이아 마을로 옮길 거라고 하셨다. 서로에게 안녕을 빌어준 뒤, 그분들은 숙소를 떠나 여행을 시작하셨다.


나 역시 토스트와 우유로 아침을 간단히 해결하고 숙소를 나섰다. 어제 주차해둔 ATV에 시동을 켜고 대로변으로 나갔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나 역시 곧 숙소를 이아 마을로 옮길 것이니, 그전에 피라 마을을 좀 더 느껴보자는 마음으로 정처 없이 ATV를 몰았다.


한적한 시골 길에 말과 당나귀들이 방목되어 있다


산토리니의 뜨거운 햇살과 지중해 바람이 온몸을 붉게 달궜지만, 질주하는 ATV 때문인지 그리 덥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 했다. 신나게 달린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이 날 처음 알게 되었다. 피라마을의 길을 달리는 순간만큼은 속세의 그 어떤 근심도 나를 침범하지 못했다. 별로 유명한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딜 가나 저 멀리 지중해 바다가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충분히 눈이 즐거웠다. 마음이 여유로워서 그랬던 건지, 별 거 없어 보여도 숨겨진 길 하나하나 다 돌아보기 시작했다. ATV가 생각보다 큰 바람에 좁은 길에서는 되돌아가기도 하고, 도랑에 바퀴가 빠져 식겁한 적도 있지만 매우 즐거운 경험이었다.


청명한 지중해의 하늘


허나 이 여유로운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늘에서 하나둘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ATV 반납 시간까지는 아직 2시간이나 남아있었지만, 이제 겨우 오전 10시인데 2시간 동안 실내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있기는 싫었다. 어쩔 수 없이 빗방울을 헤치고 렌털 샵으로 ATV를 몰아 내 정든 애마를 반납했다.


더 이상 비 오는 피라 마을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판단되자, 망설임 없이 이아 마을로 옮기기로 했다. 만약 비가 오지 않았다면 ATV를 통해 이아 마을로 갈 생각이었다(워낙 좁은 섬이라 단시간 내에 도착 가능하다고 한다). 허나 비가 오다 보니 대중교통을 활용해야 했고, 산토리니에서 대중교통은 버스가 유일했다. 숙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버스 정류장으로 가, 이아 마을로 향하는 티켓을 끊었다. 얼마 기다린 것 같지 않은데 이아 행 버스가 정류장 안으로 서서히 들어왔고, 나를 포함한 관광객들 모두 버스에 탑승했다.


산토리니 해안길, 버스 안에서 보이는 무지개




순백의 마을


약 30분 정도를 달렸을까, 우리는 이아 마을에 도착했다. 중간중간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ATV 모는 사람들이 부러웠지만, 이미 늦었다.


확실히 이아 마을은 익숙했다. 전에 왔던 곳이라서가 아니라, 산토리니를 찾으면 나오는 사진들의 반 이상이 이아 마을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으로만 보던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그 순간 느꼈던 청아한 기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온 세상이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통일성 있게 구성된 마을은 처음 본 것 같다. 같은 하얀색이더라도 여러 색이 있기 마련인데, 이아 마을의 건물과 길들은 다 '같은' 하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마치 마을 하나가 하얀 숨결을 내쉬는 것 마냥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거기서 느껴지는 맑은 기운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골목길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고양이


하지만 이아 마을을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다름 아닌 고난 길이다. 짧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내가 이아 마을에서 묵기로 한 곳은 '아무디 빌라 호텔(Amoudi Villas Hotel)'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냥 해변 옆이라 잡은 곳. 버스 정류장과의 거리도 걸어서 최대 20분이라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예전에도 말했듯, 현재 내 스마트폰은 인터넷 사용이 불가능하다. 그랬기에 이아 마을 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아무디 빌라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구글 지도를 눈대중으로 훑어본 걸로는 무리였던 것이다. 개탄스러운 마음을 접어두고 정류장 근처의 택시를 잡았다. 기사님 말로는 가까운 거리니 기본요금만 받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아무디 만'이었다. 이곳에 아무디 빌라 호텔이 있다고 말씀하신 택시 기사님은 그대로 왔던 길로 돌아가셨다. 당시 내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무더운 열기와 무거운 배낭으로 인해 땀이 비처럼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내가 아무디 빌라 호텔을 도저히 못 찾겠다는 점이었다. 사진에 보이는 모든 집들을 둘러봤지만 'Amoudi Villas Hotel'이라는 간판을 가진 집을 찾을 수 없었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있었고, 몸 역시 축축 늘어지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윽고 나는 결단을 내렸다. 내가 잘 못 찾아왔다고.


절벽 위를 보니 하얀 집들이 군락을 이루며 아름다운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 아름다움에 현혹됐던 것일까? 나는 아무런 근거 없이 '아무디 빌라 호텔은 저 절벽 위에 있을 거야!'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내가 한 행동은 천하에 어리석은 짓이었다. 30도가 넘어가는 날씨에 옷 두 겹을 껴입고, 50kg짜리 배낭을 멘 상태인 내가, 절벽을 올라 이아 마을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아름다움이 고통을 반감시켜줬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저 수많은 계단을 오를 생각을 하다니. 이때의 기억이 너무 강렬한 탓인지, 처음 이아 마을을 봤을 때보다 이때의 풍경이 머리에 더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한 15분을 걷자 몸은 녹초가 됐고, 이를 농락하는 것인지 내 눈앞 계단에 '300'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 300번째 계단이라는 뜻 같았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일본인 할아버지가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이제 딱 반 왔네, 젊은이!"


끝이 안 보인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죽인 채, 다시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거두절미하고 요약하자면, 내가 처음 도착한 아무디 만이 제대로 된 장소가 맞았으며, 나는 내가 택시를 타고 온 거리만큼 걸어서, 그것도 계단으로 된 언덕을 올라 돌아온 것이다. 첫날 피라 마을에서 마주한 산토리니의 계단 언덕은 둘째 날 이아 마을에서도 이렇게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계단을 올라도 호텔을 찾을 수 없던 나는 할 수 없이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이곳의 장소를 물었다. 친절하셨던 주인 분은 직접 그 호텔에 전화를 걸어 나를 데리러 이곳으로 오라고 부탁했다. 그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평생 이 숙소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전화를 해야 주인이 와서 픽업해주는 구조였던 것이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던가. 아무디 빌라 호텔은 내가 기존에 알던 호텔과는 달리, 각 방들이 서로 떨어져 있는 원룸 형태의 호텔이었다. 간판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방을 보자마자 조금 전에 겪었던 고초들이 한 번에 사라져 버렸다. 영화에서나 보던 방이 내 눈앞에 펼쳐져있던 것이다.


입구부터 심상치 않았던 숙소와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앤티크한 거실
배 안에 있을 것 같은 침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현관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해안가의 절경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태양과 지중해 바다, 그리고 어선들이 보였다. 시골이라 그런지 문명의 이기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 백 년 전, 어쩌면 수 천년 전의 이 마을 주민들이 보는 풍경 역시 지금 내가 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여기서 볼 노을과 아침 해가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


방문을 열면 보이는 해안가


가장 먼저 한 건 샤워를 하는 것.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니 피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아침부터 ATV를 몰고,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락 했으니 안 피곤한 게 이상했다. 잠깐 동안의 낮잠은 괜찮다는 생각에 침대에 누웠고, 거짓말처럼 바로 잠이 들었다.




푸른 노을


눈을 떠보니, 한 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덕분에 방 안은 선선했고 기분 좋은 상태로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창문을 열었을 때의 풍경 역시 이 기분 좋음에 더한 환희를 가미했다.


점심을 못 먹어서 그런지 슬슬 배가 고파왔고, 옷을 챙겨 입어 방을 나왔다. 식당들이 위치한 곳에 가려면 아까 내가 오른 계단을 다시 올라야 했다. 허나 이미 한 번 오른 계단이기도 했고, 몸이 가볍다 보니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고양이들이 사람 손을 별로 안 무서워한다


마을 골목길을 걸으며 이아 마을을 천천히 감상했다. 나는 원래 길고양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고양이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고 위생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이스탄불에서 개와 고양이들이 모두 식별표를 가지고 있고, 주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그들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 산토리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산토리니는 강아지보다는 고양이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들은 사람들에게 항상 사랑받아서 그런지 낯선 이방인인 나에게조차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고 아양을 떨었다. 이 아이들과 하루 종일 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배고픔을 참을 수는 없었고, 근처에서 전망이 좋은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갔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레스토랑


치킨 수블라키를 주문한 나는 잠시 책상에 앉아 레스토랑 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이런 멋진 풍경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던 나는 챙겨 온 일기장을 글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입맛을 자극하는 경치


산토리니 섬은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을 집필한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기도 하다. 몇십 년 전, 하루키 역시 나와 같은 장소에서 이렇게 글을 쓰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하니 내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으로 쓰니 더욱 운치가 있었던 것 같다


'상실의 시대'를 관통하는 분위기는 '상실감'이다. 산토리니의 멋진 해경을 바라보니 그 감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광활한 대자연은 나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불변하는 자연, 그 안에서 서서히 소멸해 갈 나 자신에 대한 상실감에 가슴이 아려왔다. 점점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해 역시 이러한 상실감을 배가 되게 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을 보면 슬퍼질 수도 있다는 걸, 이스탄불 이후로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스탄불의 야경을 보며 아려오던 가슴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하루키는 이 광경을 보며 상실에 대한 슬픔을 글에 담아냈던 게 아닐까...


한창 감성적인 나를 깨운 건 마침 나온 치킨 수블라키의 화려한 비주얼과 냄새였다. 갓 구운 빵과 막 튀긴 것 같은 감자, 그리고 싱싱한 닭고기의 육질이 나를 다시 현실세계로 이끌었다. 옆에 곁들여 있는 피망과 파프리카 역시 신선했다.


평소에는 입에도 안 대는 파프리카 마저 비워냈다


계산을 하고 일어섰을 때, 이미 해는 구름 사이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비수기라 그런지 벌써 마을 상점과 가게들은 문을 닫는 추세였다. 얼른 주변 마트로 들어가 내일 아침에 먹을 것들을 구매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산토리니의 노을


내 눈에 들어온 건 산토리니의 푸른 노을이었다. 지금 와서 사진으로 보면 푸른색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지만, 어째서일까. 그 당시의 나는 분명히 푸른 노을을 봤다고 확신한다. 내가 푸른 노을을 볼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와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푸른 노을을 봤다. 푸른 바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저 멀리 보이는, 아직 노을에 물들지 않은 푸른 하늘 때문이었을까. 그 날 핑크빛으로 젖어들어가는 하늘 속에서, 난 나만이 볼 수 있는 푸른 노을을 눈에 담았다.


아무도 없는 이아 마을의 골목길


산토리니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관광지는 비수기가 좋고, 휴양지는 성수기가 좋다는 것이다. 비수기의 이아 마을에서는 저녁 6시가 넘어가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시간이 아깝거나 하지는 않았다. 바쁜 여정으로 인해 처리하지 못했던 생각 혹은 사진들을 정리할 여유를 갖게 된 장점도 있었다.


그리스는 왠지 모르게 아련한 국가다. 고대 시절 인류의 문화가 번성했던 시작점이었지만, 당시는 그렉시트(Grexit)로 인해 경기도 안 좋아지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때였다. 이런 국가적인 분위기와 섬이라는 공간적 장소가 만나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걸지도 모른다. 외로운 섬,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홀로 걷자니 갑자기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우울함이 밀려오며 내 발걸음을 숙소로 이끌었다. 이 순간만큼은 수 백개의 계단을 내려가는 게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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