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코비드 19로 외출 금지령이 내려진 미국 조지아 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2020년 3월과 6월 사이 100일 동안 걷기 말고는 할 것이 없었던 한 여성의 '처절한'이야기입니다.)
역사 유적지처럼 보호하는 곳을 공원으로 탈바꿈해 일반인들에게 공개한 것이다.
전형적인 미국 남부의 농장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언덕 위에 하얀색 집이 있고 그 주위로 울창한 나무들이 서있다. 집에서 경사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목초지가 펼쳐진다. 실개울이 십자 형태로 흐르고 있다. 탄성을 자아내는 풍경이 걸음걸음마다 펼쳐진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여주인공이 삶의 의지를 다졌던 곳 ‘타라’의 축소판이라고 할까.
미국 남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소설을 5번은 읽었다. 영화는 열 번은 본 듯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빠진 이유는 여주인공 때문이다.
‘스칼렛 오하라’는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당돌함, 용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무색하게 만들 치명적인 단점 또한 가지고 있다. 주어진 것에 만족을 못하고 남의 것을 탐낸다. 결코 행복하지 못할 성격이다. 결국 엔 자신을 사랑해줄 수 없는 남자에 집착한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는 지쳐 떠나간다.
그래도 스칼렛 오하라가 좋았다. 내게 없는 것들만 가지고 있다는 부러움 때문이다.
좋아해 주는 남자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만큼 사랑하는 남자도 없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책을 봤을 때는 초등학생 때였다. 그때 책을 읽으며 언젠가 열정적인 사랑을 할 것이라며 자신을 스칼렛 오하라와 동일시했다. 상상의 나래가 과했다. 내 자신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나이가 되면서 정신을 차렸다.
미국 1년 살기로 조지아 주의 주도인 애틀랜타를 선택한 이유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때문이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애틀랜타다.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LA 등은 생활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싼 곳을 찾다 보니 온 이유도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애틀랜타를 운명의 도시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그렇게 좋아하더니 이럴 운명이었구나. 나는 애틀랜타에 가게 될 운명이었구나. 나는 애틀랜타에서 운명의 사랑을 만나나... 라며 억지 연결고리를 찾아갔다.
운명적 도시에 운명적 풍경을 보며 걷고 있으니 위안이 됐다. 할 수 있는 것은 걷는 것 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오고 싶어 했던 곳 아닌가. 여기서 질리도록 풍경을 맛보고 가리. 내 운명의 도시가 나를 부른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운명의 남자 레트 버틀러를 만날지...
이것이 소설과 현실의 차이다.
*효과적인 걷기 자세 요령*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면 여주인공이 드레스를 입기 위해 코르셋을 조이는 장면이 있다.
여주인공 비비안 리의 개미허리는 영화만큼이나 유명해졌다.
이런 개미허리를 만드는데 걷기 운동이 효과를 볼 수 있다. 배에 힘을 주고 배가 등짝에 붙을 것 같다는 느낌으로 압박을 해야 한다. 일순간 압박했다 푸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