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같은 길을 걷는 게 살짝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산책남을 만나기 위함이 주목적이지 그게 아니라면 걷기도 금방 포기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여러모로 산책남의 존재는 걷기의 동력이 되고 있다.
산책코스에는 걷는 사람만큼 뛰는 사람도 많다.
그들이 3.7km 코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뛰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42.195km를 뛰는 사람도 있는데 3.7km 한 바퀴를 못 뛰겠나고 유추할 뿐이다.
나는 당연히 못 뛴다. 아마 3백 미터도 뛰기 힘들 것이다.
단거리도 못하지만 장거리는 쥐약이다.
학교 체육시간에 마라톤을 하면 항상 하위권, 아니 꼴찌에서 1,2등 했다.
끈기가 부족한 것일까 폐가 약한 것일까.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나의 몸이 장거리 달리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명백하다.
어렸을 때도 싫었던 달리기를 나이 들어 뛰겠는가.
장거리를 걷는 것도 무릎에 통증이 오는데 뛰면 더 무리가 올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도가니가 나가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어느 날 , 걷고 있는 나의 옆을 휙휙 지나가는 러너들을 보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느꼈던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속이 답답할 때는 한번 힘껏 달려보는 것도 좋을듯한데 달려볼까?
이런 마음이 여러 번 들었다 사라졌다 하고 있었다.
오늘은 날도 우중충하고 마음은 더욱 우중충했다.
걷기도 살짝 지겹고 몸이 처지는 한심스러운 날이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집에서는 놀고먹고 유일하게 하는 일이라고는 걷기 뿐인 지금의 삶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울고 싶었다.
운명의 장난질에 화내고 싶었다.
순간 발걸음이 빨라지더니 이내 달리고 있었다.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라 질주를 하는 것이었다.
100미터 달리기처럼 온 힘을 다해 전력질주를 한 것이다.
아마 30미터도 채 가지 않고 멈춰 섰던 것 같다. 숨을 참지 못했다. 헉헉대며 고개를 떨궜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런데 속은 한결 가벼웠다.
소화가 안 돼 기도를 막고 있던 게 격렬한 운동으로 대장 어디쯤으로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울면서 달리기를 언제 해 봤던가.
울면서 달리는 느낌이 이렇게 상쾌하다면 자주 울어 주리라.
자주 울면서 달려 주리라. 다만 사람이 없을 때를 노려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걷기 시작했다.
분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몸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달리기가 내게 무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또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가끔. 아주 가끔은 전력 질주를 할 필요는 있다는 것을.
살면서 전력질주를 해본 적이 없다.
그 느낌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한발 한발 억지로 질질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강제적으로라도 전력질주의 느낌을 주는 것, 전력 질주하는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이 꽤나 신선한 일이었다고 깨달았다.
(이 글은 코비드 19로 외출 금지령이 내려진 미국 조지아 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2020년 3월과 6월 사이 100일 동안 걷기 말고는 할 것이 없었던 한 여성의 '처절한'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