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지만 못한 것이 맞다.
결론적으로 요즘엔 물어보는 사람도 없다.
타지에 남과 같이 살면서, 같이 살게 된 어느 ‘이상한’ 여자를 생각하며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
나는 그 여자를 상대하지 않는다. 말을 섞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의를 당부해도 소용이 없고 항의해도 소용없다면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것이다.
같이 살아야 하는 이상 참아야 한다.
참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최대한 접촉을 줄이며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사람과 결혼을 했다면?
그나마 옆방의 여자는 나의 선택이 아니었기에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롯이 자신의 선택으로 결혼한 남자가 미치게 한다면?
나보고 미혼의 외로움과 기혼의 괴로움 중에 선택하라고 한다면 미혼의 외로움을 택할 것이다.
여기에도 오류는 있다.
미혼의 외로움은 거의 확실한 것이지만 기혼이 꼭 괴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성을 치자면 오히려 기혼의 괴로움이 크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리고 기혼이 됐다고 해서 외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같이 있는데도 외롭다면 더 비참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분석 끝에 좀 더 편하고 안전한 것은 ‘미혼의 외로움’이 된 것이다.
예전에 회사 선배한테 이렇게 짜증을 낸 적이 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을 잊었는지 식사시간에 선배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아이고’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신경을 긁은 것이다.
왜 날 앞에 두고 곡소리로 먼저 시작을 한단 말말인가.
대화의 끝은 서로에게 치명상만 남기고 끝났다.
미혼의 외로움에 가끔 괴로움까지 더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의 편견 때문이지 않을까.
혼자 걷는다.
지금까지 혼자 걸었다.
앞으로도 혼자 걸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선택한 길이다.
(이 글은 코비드 19로 외출 금지령이 내려진 미국 조지아 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2020년 3월과 6월 사이 100일 동안 걷기 말고는 할 것이 없었던 한 여성의 '처절한'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