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일 차/ 영어 오디오북을 듣기 시작하다

by 집녀

미국에 1년 살면서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움에 미칠 지경이다.

유학 오지 않은 이상, 교포지 않은 이상 한국 사람으로서 영어를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어릴 때는 유학 보낼 형편이 안 되는 집안을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 탓할 일이 아니었다.

독학으로도 영어를 잘했다며 성공담을 올린 사람들을 보니 결국은 자신이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됐다.


어찌 됐든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대화를 할 수 없으니 영어 실력은 1도 늘지 않고 있다.

그냥 미국에 운동하러 온, 전지훈련 온 느낌이다.


그러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걷기 운동을 할 때 음악을 듣지 말고 영어 오디오북을 듣는 것이었다.

운동과 공부를 동시에 할 수 있으니 시간 절약도 되고 얼마나 좋은가?

아침저녁으로 적어도 3시간 이상은 매일 영어를 듣게 된다.

실력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어 오디오북을 다운받아 걷기 운동할 때 듣기 시작했다.


오늘이 그 첫날이다.


첫 번째로 택한 소설은 헤르만 멜빌의 ‘모비딕’이다. 수준 높은 책이다.

굳이 이 오디오북을 고른 이유는 공짜기 때문이다.

공짜로 다운받을 수 있는 책들은 죄다 고전이었다.


‘그래 이참에 문학적 소양이라도 좀 넓히자’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한 번은 읽어봐야 하는 책들을 이번 기회에 읽으니 얼마나 좋은가.

... 그래서 듣기 시작한 모비딕은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다...


애초부터 무리한 시도인가 생각했다.

하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겠다는 생각. 사실 이것은 고질병이기도 하다.

나는 항상 남들보다 뒤처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들은 다들 열심히 살고 있는데 혼자 도태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 불안하고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 뭐든 해야 한다며 자신을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걷는 것 이외에 자기 계발을 위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그래서 영어 오디오북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다.

하지만 심약한 사람들에게는 실패가 계속되면 마음의 상처만 커진다.

모비딕 오디오북은 실패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한 시간 반 내내 걷는데 들을 수 있는 문장은 3%도 안 된다.

그만 들으려니 오기가 생긴다. 벌써 포기하지 말자.


하나는 확실하지 않겠는가.

듣지 않을 때보다는 듣기 시작한 뒤가 영어실력이 단 1%라도 나아질 것이라는 것.

시간 대비 투자에 비해서는 눈에 띄는 성과를 못 보더라도 걷기 운동의 부수적 효과라면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비딕, 내 너를 잡고 말리’

라고 외치는 소설 속 주인공 에이햅 선장처럼


‘모비딕, 내 너를 듣고 말리’

라고 속으로 외친다.




(이 글은 코비드 19로 외출 금지령이 내려진 미국 조지아 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2020년 3월과 6월 사이 100일 동안 걷기 말고는 할 것이 없었던 한 여성의 '처절한'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