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당시 내가 활동하고 있던 기독학생회에서 경기도 안성군 고삼면 가유리에서 주말 진료 활동을 하게 되었다. 고삼면은 인구 2천 여명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작은 면이라 했다. 전통적인 농촌 마을로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불을 때고 살고 있었고 병원을 다닌다는 건 생각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고삼면 가유리에서는 자생적으로 결성된 청년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우리가 진료활동을 하게 되면 마을에도 도움이 되고 청년회가 신뢰를 얻기 좋을 거라는 생각에 박대희라는 분이 진료를 요청했다. 우리는 안성진료팀을 만들어 2주에 한 번 토요일에 버스를 타고 고삼면으로 갔다. 당시 우리 팀 중 유일한 의사였던 이인동 선배가 레지던트 2년 차여서 진료를 하였고 약국을 열고 있던 민영미 선배가 약을 공급해 주었다. 마을에 빈 집이 있어 그 집을 진료소로 사용하기로 하고 약장도 마련했다. 당시 쇠퇴해가던 농촌에는 사람이 살다가 떠나면서 버려진 집들이 있었다. 진료와 가정방문을 하고 나면 청년회원 집에서 차려주는 저녁을 먹고 빈 집에서 열리는 청년회의 회의에 함께 참석했다.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을 돕고 또한 농민들의 권익을 찾으려는 이들의 회의에서 나는 책에서만 보던 ‘민중의 힘’을 느꼈다.
회의가 끝나면 밤이 깊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농촌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공부하는 이야기 등. 당시 여학생들은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불렀었는데 청년회원분 들한테도 형이라 불렀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여성이 여성으로 인식되고 싶어 하지 않는 주체적이지 못한 표현이었던 것 같다). 이 형들의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배꼽을 잡곤 했다. 우리는 현장의 이야기들이 신선했고 형들도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으리라. 여학생들이 형이라 부르는 것이 좀 우습기도 재미있기도 하였을 터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같이 병원을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우리가 안성이 좋고 형들이 좋아 안성에서 일을 하고 싶은데, 맘 좋은 의사가 봉사하는 그런 거 말고 형들이 병원 만들어서 우리 고용하는 게 더 재미나지 않겠나! 그거 좋겠다! 그럼 어떤 형식으로 하면 좋을까 찾아보기 시작했다.
의과대학생들이 공부라면 또 남들 저리 가라 하지 않나. 생산자 협동조합, 몬드라곤 이야기, 한국사회 의료시스템의 문제, 농촌 현실과 의료문제, 여성문제, 맨발의 의사, 의료 운동사 등등 많은 공부를 하여 두꺼운 자료집을 내었다. 여러 차례 세미나를 거친 후 의료생활협동조합(의료생협) 형식을 택하기로 했다. 농민을, 시민을 주인으로 세우고 치료 및 예방사업, 건강을 지키는 사업을 해나가는 데는 협동조합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만들고 보니 일본에서 이미 40년 전부터 의료생협이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7년 후 의료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안성군 농민회 회장을 지냈던 이수청 씨가 이사장을 맡게 되었다. 만들어 놓으니 여기저기서 견학을 오고 다른 지역에도 하나 둘 생겨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생협법이 없어 임의단체였고 농민의원도 법적으로 개인 소유여서 세금 문제 등 어려운 일이 많았다. 생협법이 통과된 후에야 법적인 조건을 갖춘 의료소비자 생활협동조합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후에 의사가 아니어도 의료기관을 설립할 수 있는 것을 악용한 의료생협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결국 조합원의 참여를 중요시하고 사회적인 역할에 충실하려고 하는 조합은 보다 설립요건을 강화하여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료사협)으로 바꾸게 된다. 연합회에 소속되어있는 의료 사협 2020년 현재 전국에 의료 사협은 25곳, 조합원 수는 총 48,554세대에 이른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