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다스림
본집에서 독립하면서 가장 슬펐던 것은 반려견과의 이별이었다. 평생 못 볼 사이도 아니고 언제든 부모님의 집에 가면 볼 수 있는 아이인데 혼자 그렇게 아련했다. 신혼 초 저녁식사 중에 함께 살던 강아지가 생각나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아내는 신나게 촬영하며 내 눈물을 즐겼다. 나와 반려견은 ‘반려’의 사전적 의미대로 ‘짝이 되는 동무’였나 보다. 강아지에겐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정확힌 모르겠지만 내겐 강아지가 큰 위로이며 친구였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천만 반려 시대”라 불릴 정도로, “펫팸족”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반려동물은 우리 삶 가까이에 있다. 이들로 인해 좀 피곤하고 부대끼긴 하지만 인간은 분명히 관심과 사랑과 위로를 받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는 반려동물을 반려하기도 한다. ‘반려’의 중의적 의미 중엔 ‘배반’이나 ‘도리에 어긋남’도 있다. 함께 아름답게 상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마음이 내키는 대로 대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신이 사람과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실 때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한 명령을 철저히 순종하려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표현은 생각보다 공격적이거나 강압적이지 않다.
정복이라는 표현은 원어인 히브리어로 ‘마샬’(מָשַׁל)이다. 마샬은 실제로 통치나 지배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 통치나 지배의 주목적은 ‘돌봄’에 있다. 대상의 안위를 위해 하는 아름다운 구속이다. 다스리라는 표현은 ‘라다’(רָדָה)인데 이 ‘라다’ 또한 정복이나 통치, 소유의 뜻이 있다. 하지만 이 ‘라다’의 목적 역시 대상이 잘 성장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가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섬김의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 좋은 왕이 백성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고 극진히 돌보는 것처럼 말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반려동물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인 부분은 ‘반려’라는 말이 공연히 쓰이게 될 만큼 동물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되고 있다. 우리가 보살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유재량이다. 알고 하는 죄질이 안 좋은 학대가 있는가 반면 모르고 하는 멍청한 학대도 만연하다. 나와 내 가족 또한 생명들에게 많은 실수를 저질러 왔다. 물고기가 물밖에 꺼내어져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각각의 반려동물에겐 보호받을 수 있는 환경과 올바른 돌봄이 필요하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것이 더 건강한 반려문화로의 발돋움이 될 것이고, 이러한 노력이 쌓여갈수록 비로소 아름다운 공존에 성공하게 될 것이다.
아, 밥 먹다가 함께 살던 강아지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쏟았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 정돈 아니다. 정말 오랜만에 강아지와 조우하는 순간이 있었다. 늘 그랬듯 내게 환장할 줄 알았는데 함께 있던 어린 조카들에게만 매달리는 것을 보곤 시련의 아픔 비슷한 것을 겪은 후부터다. 배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