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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결된 봄 Oct 15. 2021

앵무새를 위하여

잘못된 만남

앵무새를 위하여


 초등학교 때였다. 난 국민학교로 입학했다가 초등학교로 졸업한 시대의 사람이다. 그 당시 ‘관상동물’이 매우 핫할 때가 있었다. 물론 ‘관상동물’에게는 그 이름과 같이 비극적인 시대였다. 보기 좋아서 보기만 하려고 가둬 키운다니. 여하튼 관상동물의 열풍으로 인해 매일의 하굣길은 일부러라도 수족관 앞을 지나갔다. 내 관심은 수족관의 주요 동물인 열대어나 금붕어나 거북이가 아니었다. 작고 귀여운 햄스터도 아니었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이구아나도 아니었다. 내 원픽은 ‘새’였다. 그렇게 마음으로만 품고 있었다. 친구도 새를 좋아해서 ‘십자매’를 샀다. 십자매를 산 후 그 친구는 요즘 말로 완전 핵인싸가 되었다.(‘분양받았다’, ‘입양했다’라는 말을 쓰고 싶지만 그 당시 초등학생의 사고로는 동물은 돈으로 사고파는 존재였다.) 친구 집에서 기르는 십자매가 알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친구 집에 출근하여 십자매를 구경했다.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십자매는 결국 나에게 ‘새 뽐뿌’를 선사했다. 


 그 친구 집에 다녀올 때마다 나의 <십자매 관찰기>는 부모님의 귀를 피곤하게 했다. 내 관찰기의 목적은 순수한 동심이 아닌 새를 키우고 싶은 간절함을 부모님께 표현하는 데 있었다. 


 외동아들로 자란 나는 부모님께 조금만 어필하면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허락해 주셨다. 보글거리는 산소방울 소리가 은은히 들리고 싫지 않은 비린내가 나는 크고 작은 어항들을 지나 파드득 날갯짓 소리가 나는 새장이 모인 곳에 멈춰 섰다. 그때 두 마리의 앵무새가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두 마리 모두 붉은색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몸통의 색은 각각 녹색과 노란색으로 같은 듯 달랐다. 크기는 부리부터 꼬리까지 10CM는 족히 넘어 보였다. 수족관 사장님은 앵무새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게 새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 큰 것도 아니라며 충분히 살 가치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앵무새 두 마리가 살고 있는 새장의 꼭대기를 달랑달랑 손에 들고 먹이와 몇 가지 용품을 받아 시내버스에 올랐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내게 시선 강탈을 당했다. 정확히 말하면 앵무새에게 모든 시선이 쏠렸다.



 드디어 앵무새가 우리 집에 입성했다. 첫출발은 그리 좋지 못했다. 새장을 열고 먹이를 주려는데 노란 앵무새가 내 손을 냅다 쪼아 피가 나고 상처가 생겼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은근히 녹색 앵무새를 편애하게 됐다.


 친구들에게 우리 집에 앵무새가 있다고 자랑하니 십자매보다 더 인기가 많아졌다. 최신형 펜티엄 PC와 앵무새가 있는 우리 집엔 늘 친구들이 넘쳤다. 외동이라 그런지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은 내 심심함을 한 움큼 덜어줬다. 처음엔 새장에 있는 앵무새에게 말을 가르치기도 해 봤다. 하지만 대답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보름 정도 새장에서 앵무새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너무 답답하지 않을까 싶어 새장을 열어놓고 방생하며 키웠다. 앵무새들은 점점 날갯짓에 익숙해졌고 집 안 여기저기를 비행했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횟수도 점점 줄어갔다. 흔히 부정적으로 쓰이는 표현이지만 ‘새 대가리’ 답지 않게 똑똑했다. 


 부모님은 앵무새들을 볼 때마다 잡아 새장으로 쳐 넣었다. 쳐 넣었다는 표정이 딱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몰래몰래 방생해주며 키웠다. 그 덕분에 집은 앵무새의 깃털과 배설물로 커다란 새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부터 진짜 사건 사고의 시작이다. 환기를 위해 잠깐 열어놓은 주방 쪽 창문은 녀석들의 탈출구가 되었다. 층수로는 6층, 평생 새장에서 자란 아이들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착지는 잘 하지만 오래 날지 못한다. 탈출하면 친구들과 잡으러 다니는 게 하루 일과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비행 실력이 순식간에 늘어버린 노란 앵무새는 내 편애가 서러웠는지 탈출 후, 놀이터에 잠깐 앉았다가 허겁지겁 잡으러 온 우리를 피해 참새처럼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허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슬펐지만 야생을 배워가며 특출 난 생존본능으로 잘 살아가겠지 생각했다. 앵무새 평균 수명이 종마다 다르지만 20년에서 40년까지나 된다고 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말도 안 되는 바람이다.


 이제 녹색 앵무새만 남았다. 나도 외동인데 너도 혼자니 우리 서로 친구가 되어 잘 지내보자 생각하고 더 많은 사랑을 주었다. 이젠 바보처럼 창문을 열어두지도 않는다. 환기를 해야 할 땐 새장에 넣어놓고 창을 열었다. 다신 잃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애정의 표현으로 우린 서로 매일 동침했다. 내 허리춤 보다 조금 높고 겨드랑이보단 낮은 쪽에 앵무새를 품어 체온을 나누며 자면 참 포근했다. 나도 포근하니 새에게도 포근한 밤이 될 거라 여겼다.


 이제 막 여름의 티를 벗고 선선해진 10월의 어느 날 밤, 여느 때와 같이 녹색 앵무새를 겨드랑이쯤에 품고 잤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겨드랑에 쪽에 단단히 굳어진 느낌의 물체가 끼어있다. 분명 플라스틱이나 돌 같은 질감이었다.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려 보니 녹색 앵무새였다. 내가 짓눌러서 압사했는지, 숨이 막혀 질식했는지, 내 겨드랑이 냄새가 지독했는지, 그렇게 녹색 앵무새도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친구들과 놀이터 한 편에 땅을 깊게 파서 묻어주었다. 며칠간 미안함에 시달렸다. 그리고 부모님과 나는 더 이상 그 어떤 동물도 기르지 않기로 약속했다.


 조금 커서 생각하니 정말 몹쓸 짓을 했다. 앵무새들에게 미안함이 가득하다. 너무 아끼고 좋아해서 한 행동들이 아이들을 죽였다. 내 모름과 착각과 부주의함이 살생으로까지 이어졌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었음에 스스로를 지탄한다. 어렸다는 것은 변명일 뿐이다.


 내 친구가 되어줬던 앵무새들아, 무지개다리 너머에선 나 같은 악당 만나지 말고 넓고 화창한 곳에서 훨훨 날며 살아줘. 미안해..


 특별했던 나의 앵무새들은 내 곁과 세상을 떠났지만 다른 불특정 동물들에겐 좋은 일을 했다. 나는 더 이상 동물을 안 키움으로 생명을 위협하지 않았다. 


 어떤 반려동물을 키우게 될 땐, 이 동물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어린 생명이 다른 생명을 돌보는 것은 매우 고난도다.
혹시 자녀에게 반려동물을 허락한 부모님들이 계시다면 자녀가 그 생명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도록 잘 지도해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함께 사랑으로 키워가길 바란다. 부모가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은 아이들의 정서발달에 매우 좋은 재료라고 한다.


홍OO님의 사연을 다듬어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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