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율 Jan 02. 2024

영국에서 혼자 유럽여행 가기

발길이 떨어지지 않던 유럽행

"똑 똑, 들어가도 되니?"

"네, 들어오세요."

"어머, 너 아직도 짐 안 쌌어? 너 오늘 유럽여행 가는 날 아니야?"


같은 플랏(Flat)에 사는 옆 방 한국 언니가 나를 살피러 왔다가 아직 짐도 싸지 않은 상황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맞다. 난 오늘 유럽여행을 가기로 되어있다. 그것도 혼자서......

그런데 난 오늘도 오전에 어학원 수업에 다녀왔고 오후에 병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에 와서 짐도 싸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도저히 혼자서 유럽에 갈 자신이 없어서 짐을 싸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영국에 어학연수 올 때부터 유럽 여행을 갈 계획이 전혀 없었다. 어학연수로 영국에 온 것만도 감지덕지다 생각했다. 그런데 유럽여행이라니? 유럽으로 여행 갈 경비도 없었을뿐더러 같이 여행 갈 사람도 없고 혼자서 여행을 갈 수도 없기 때문에 유럽여행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영국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과 언니 오빠들은 이구동성으로 영국에 온 이상 유럽여행은 꼭 가야 한다고 나를 설득했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다시 유럽에 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였다. 맞는 말처럼 들렸지만 그래도 혼자 유럽을 갈 자신이 없었다. 주변에 한국인들이 많았고 모두 유럽여행을 갈 계획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학연수 과정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직전에 유럽여행 일정을 잡는다. 같은 어학원에 다니는 한국인 친구가 있더라도 영국에 입국한 날짜가 다르듯 출국하는 날짜도 다르기 때문에 유럽 여행을 가더라도 일정은 매우 차이가 나서 여기서 만난 한국인과 같이 여행을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어학원 같은 반 한국인 학생이 나와 비슷한 시기에 유럽으로 혼자 여행 갈 예정이라고 했다. 만나서 이야기해 보니 시기는 비슷한데 여행하려는 유럽 국가가 서로 많이 달랐고 이탈리아 한 국가만 겹쳤다. 그래서 우리는 이탈리아만 만나서 같이 여행하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나보다는 몇 살 아래인 그 친구와 이탈리아를 같이 여행할 수 있다는 것 하나로 위안이 되어 유럽여행을 결정했다. 한국 학생들이 추천하는 데로 유레일 패스를 구입하고 배낭여행으로 다닐 것이기 때문에 숙소 예약은 하지도 않았다. 겁도 많았던 내가 숙소 예약을 하지도 않고 아무 대책 없이 유레일 패스 한 장만 달랑 구입해 놓고 유럽여행을 가겠다고 한 것이다. 나를 재촉하는 것은 사실상 유레일 패스의 유효기간과 이탈리아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밖에는 없었다.


옆 방 언니는 내가 여행 당일 오후가 되도록 아직 짐도 싸지 않고 있자 내가 엄청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오늘 유럽 여행만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이 숙소에서 짐을 빼서 방을 비워주기로 했다. 유럽 여행을 하는 한 달 동안 영국에서 빈 방의 값을 치르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주인아주머니께 말씀드려서 내 짐을 빼서 창고에 보관해 달라고 부탁을 해 둔 것이다. 내가 방을 비워야 아주머니가 세를 놓을 수 있으니 나는 어찌 됐건 짐을 싸서 나와야 했다. 이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옆 방 언니는 나의 대책 없는 모습을 보고는 같은 플랏에 있는 한국인 학생 1명과 중국인 학생 1명을 불러 모았다. 모두들 같은 플랏에 살아서 친분이 있는 동생뻘 유학생들이었다. 이 친구들까지 모두 4명이 내 짐을 싸주니 1시간도 되지 않아 1년 산 짐이 모두 가방으로 옮겨졌다. 여행하면서 들고 다닐 배낭을 제외하고 모든 짐이 큰 이민 가방 하나에 들어갔다. 이 짐을 집주인아주머니의 창고로 옮겼다. 이제 내가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옆 방 언니와 다른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잘 다녀온다는 인사를 했다. 그런데 옆 방 언니는 그래도 내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나를 버스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겠다는 것이다. 플랏 친구들까지 모두 함께 나를 정류장까지 바래다 주기로 하였다. 숙소에서 버스 타는 정류장이 있는 시내까지는 적어도 걸어서 15분은 가야 했는데도 말이다.

  나의 여정은 영국을 떠나 제일 먼저 프랑스로 가는 것이었다. 프랑스로 가는 가장 저렴하고 빠른 방법이 바닷가가 있던 내가 사는 곳 본머스에서 버스를 타고 Poole(풀)이라는 항구도시로 이동하여 거기서 프랑스행 배를 타는 것이었다. 그런데 풀로 가는 버스는 시내에서만 섰기 때문에 모두들 시내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시내에 도착하자 어느덧 초저녁이 되어 어둑어둑하고 가로등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옆 방 언니와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나 혼자였어도 어떻게든 짐을 싸서 길을 나섰겠지만 이렇게 도움을 받으니 마음이 든든하여 혼자 인 것 같지 않았다. 정말 감격스럽고 고마운,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버스를 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풀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풀 지도를 한 장 들고 항구를 찾아갔다. 날은 더 어둑해져서 가로등불에 의지하지 않고는 도저히 지도를 볼 수 없었다. 지도로는 항구에 온 것 같았지만 내 눈에는 항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길가에 사람이 없었다. 나는 겉으로는 표시 내지 않았지만 혼자였기에 무서워지기 시작했고 여행을 시작한 것이 조금씩 후회가 되기도 했다.

내가 이 여행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을까?


주위를 잘 살펴보니 누군가 한 사람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등치가 꽤 큰 4~50대 정도 되는 남성의 뒷모습이었다. 평소에 이런 시간이라면 여성에게 길을 물었겠지만 이 어두운 저녁 시간에 낯선 곳에서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라곤 없으니 나는 사람을 가려 길을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너무 반가워서 일단 뛰어가서 항구로 가는 길이 어딘지 물었다.

그는 중년 정도 되는 영국인이었고 그 주변에서 일을 하는 작업자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에게 항구는 이 근처에 있고 배시간은 아직도 멀었으니 가까운 펍(Pub)에 가서 코코아 한 잔 사주겠다고 했다. 사람이 몹시 반가웠던 터라 나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펍이 있었고 그는 맥주 한 잔 나는 콜라 한 잔을 마셨다. 펍 안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안에는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밖에는 그렇게 아무도 없었을까?'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내가 혼자 유럽 여행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행을 즐겁고 안전하게 하라며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러고는 자기는 일하러 가야 한다며 펍을 나갔고 날 보고는 따뜻한 펍에 있다가 뱃 시간이 되면 늦지 않게 가서 타라고 일러주었다.

  낯선 아저씨에게 길을 묻기 조차 무서웠는데 이렇게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일 줄이야. 그는 20대 중반이었던 나를 아주 어리게 보고 어린 학생이 혼자 여행 가는 것을 응원해 준 듯했다. 유럽여행을 한다는 것에 설레고 흥분되기보다 두렵고 긴장이 되었던 나는 여행을 시작하며 낯선 사람의 친절함을 통해 용기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영국에서 프랑스행 배에 올라탔다.


사진 출처: Pixabay


이전 04화 키다리 아저씨-말콤 Malcolm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