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시나가와 전철역에서 나와 역 바로 앞에 있는 호텔을 향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반쯤 건넜을 때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고 찌릿한 감각이 치솟아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가방!' 내 등에 매고 있던 가방이 없었던 것이다. 가방이 없는 것과 동시에 그 가방을 전철에 놓고 내린 것이 기억이 났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몇 걸음 앞에 가고 있던 사장님에게 가방을 놓고 내려서 찾으러 가겠다고 말하며 호텔에 먼저 가 계시라고 소리쳐 얘기했다.
나는 시나가와 역으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하지만 사장님에게 같이 가자고 할 수가 없었다. 사장님은 소아마비가 있어서 한쪽 다리를 저셨다. 1초라도 빨리 가야 할 만큼 다급한 상황에서 함께 뛸 수 없으니 사장님께 호텔로 먼저 가 계시라고 말한 것이다. 역사로 들어가 역무원이 있는 안내데스크 쪽을 향해 돌진했다. 거기엔 젊은 역무원이 있었고 나는 다가가자마자 "내가 가방을 잃어버렸다."라고 영어로 소리쳤다. 절규하는 목소리였다. 다행히 그 역무원은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젋은이었다. 흥분하면서 울먹이는 나에게 "분실물 센터로 가라"라고 그도 같이 소리쳐 말했다.
그가 손으로 위치를 가리켰지만 분실물센터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안내문은 모두 일본어로 되어 있었고 역사 안은 너무 복잡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분실물 센터를 찾고 있는데 그가 내게 달려왔다. 내가 외국인인 것을 알고 나를 도와주러 온 것 같았다.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가는 길이 생각보다 복잡하여 그가 아니었으면 혼자 찾아가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 분실물 센터 안으로 들어가니 나이가 지긋한 직원분이 계셨다. 같이 따라와 준 역무원이 일본어로 내 상황을 설명하는 듯했다. 알고 보니 이 역무원은 분실물 센터 직원분이 영어가 가능하지 않은 것을 알고 통역을 하러 따라와 준 것이었다.
나는 가방을 전철의 선반 위에 놓고 내렸다고 설명했다. 가방의 크기와 모양, 색깔을 설명하자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분실물 센터 직원분이 물었다. 가방 안에는 현금 조금과 바이어들과의 회의 기록 및 바이어 연락처 그리고 무엇보다 여권이 들어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꺼억꺼억 울어버렸다. 진정할 수가 없었다. 따라와 준 역무원이 나를 달래주기까지 했다.
나는 캐릭터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일본 도쿄에서 캐릭터 박람회가 있어서 회사의 캐릭터 홍보와 바이어와의 라이선스 계약을 위해 도쿄로 출장을 온 것이었다. 박람회가 끝난 날 홍보와 전시용으로 가져온 회사의 캐릭터 상품 샘플을 가득 담아 이민가방에 넣어서 호텔로 돌아오고 있었다. 회사 경비를 아끼기 위해 사장님은 택시를 타지 않고 전철을 타자고 했고 며칠 동안 박람회를 한 후 마지막 날 무거운 이민가방을 끌고 다니느라 나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전철 안은 평일 낮이어서 만원은 아니었지만 앉을자리는 없었다. 한참을 서서 가다가 내가 매고 다녔던 작은 가방조차 무겁게 느껴져서 내리는 역까지 잠깐이라도 쉬려고 선반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깜빡하고 그냥 두고 내렸던 것이다.
'여권이 없으면 우리나라로 돌아가지 못할 텐데.'
'바이어들과의 회의 내용과 바이어들 연락처는 어쩌지?'
'나 때문에 회사에서 출장 온 것이 헛수고가 되는 것이 아닌가?'
외국에서 여권을 잃어버리다니, 더구나 나의 실수로 회사와 사장님께 커다란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니 울음이 그치질 않았다. 계속 울먹이며 얘기하는 내 모습과 분실한 가방 안에 여권이 들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역무원과 직원분 모두 상황을 심각하게 여긴 것 같다.
나이 드신 직원분은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타원형 모양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고는 내가 탄 노선은 순환로여서 열차가 되돌아오기 때문에 내가 전철의 어느 플랫폼에서 내렸는지 정확히 알면 열차에 들어가서 가방을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전철의 어느 위치에서 내렸는지 기억할 리가 있나? 나는 일본에도 도쿄에도 이 역에도 생전 처음 왔는데 더구나 길치인 내가 그 위치를 도대체 어떻게 기억을 한단 말인가! 내린 위치는커녕 지금 다시 전철을 타러 가라고 해도 길을 묻고 물어 갈 판이었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직원분은 계속 타원형 그림을 그려가며 내린 위치를 기억해 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얘기했다. 나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 역은 너무나도 복잡한 데다 한국도 아니고 내린 곳을 도저히 기억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은 없는지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익숙한 한국말소리가 들렸다.
"나, 우리가 어디서 내렸는지 알아!"
사장님이었다. '내린 곳을 알고 있다니!' 사장님이 구세주 같았다. 사장님이 여기를 어떻게 알고 오셨을지 궁금했지만 그걸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우리가 내린 곳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도 궁금했지만 그건 나중에 묻기로 하고 나는 이 여자분이 나의 사장님이고 이 분이 우리가 내린 곳을 알고 있다는 말만 역사분들에게 전했다. 역무원과 직원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열차로 가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