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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혼자 남았다

외로울 땐 떡볶이

by 아라

공동육아방과후에 다니는 아이가 5학년이 되었다.

아이가 혼자 남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성 친구가 없이 혼자 남은 것이다.

이 때의 상황을 말할 것 같으면, 1-2학년 때 10명까지 갔던 같은 학년의 공동육아 멤버들은 몇 년 사이 반 이상 떠나갔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많은 경우는 아이가 아니라 양육자가 너무 멀리 있는 직장에 다니게 된 케이스였다. 그 결과 해외 이주나 지방 이주를 하게 되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공동육아하면서 이별은 늘 찾아왔다.

어린이집에서는 6세나 7세가 되면 이제는 학교 갈 준비를 해야겠다며 떠나는 이들이 있었다. 갈등이나 어떤 불편함으로 인해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방과후는 어린이집보다 더 흔하게 이별이 찾아왔다. 나는 제자리에 있는데 주위의 사람들이 떠나가는 일이란, 남은 이들에게는 서운한 일이었다. 오래 함께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여기는 학교가 아니다. 학교는 의무이지만 공동육아 돌봄은 선택이다. 그러니 막을 도리가 없다. 보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3학년까지 8명이 와글와글 놀았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5학년이 되자 같은 학년에는 넷만 남았다. 남자 아이 둘, 여자 아이 둘.

아이는 그 중 한 아이와 단짝이었다. 아이는 언젠가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터전에서 일과를 마치면 그 친구와 함께 떡볶이를 먹으러 다녔다. 덕분에 엄마인 나는 월요일마다 저녁 식사 준비를 면제 받았다.


우리 집은 사실은 아빠가 있지만 저녁 시간엔 아빠는 코빼기를 비출 일이 없는 그런 집이었다. 내가 공동육아에서 베프들을 만나게 된 건 다 남편 덕분(?)이다. 아빠가 저녁 시간에 늘상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아빠가 없는 집 엄마들끼리 아주 특별하게 친해졌다. 서로의 아이들 맡기고 맡아 주며 마실을 했고 그렇게 서로의 직장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ㅎㅎㅎ 아이는 친구와 떡볶이를 먹으며 특별한 시간을 보냈고 나는 동동거리며 집으로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하루 있는 것이 눈물겹게 행복했다. 월요일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흡사 여우를 기다리는 어린 왕자라도 된 듯이 설레어 사무실 동료들에게 "나 집에 안 가도 되는 데 나랑 술 마실 사람!"을 외치고 동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의 단짝 친구가 부모의 직장을 따라 지방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헉. 위기다!


공동육아는 통합 교육을 지향한다. 연령, 성별, 장애-비장애 등 통합 교육을 지향하므로 '반'이 아니고 '방'을 구성한다. 늘 연령과 성별이 섞여 있어 어울려 지내기 때문에 는 동 학년 같은 성별의 친구가 없는 것이 꼭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같은 학년에는 다른 성별의 아이도 둘 더 있었다. 터전에서는 다 함께 어울린다. 물론 다른 학년 형, 언니, 동생들과도 마실도 하고 잘 지냈다.


하지만 단짝은 단짝이었다.

단짝 친구가 떠나가는 상황은 그 자체로 아이에게 충격이자 슬픈 이별이었다.

게다가 어느 새 사춘기에 접어 들어 누구든 마실이라면 신나 하는 나이도 아니었다.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하고, 때때로 학교 친구와 놀기 위해 터전을 빠지는 날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렇게 친구를 멀리 떠나 보낸 아이가, 어느 날 물었다.

"엄마, 나도 그냥 터전 안 다니면 안 돼? OO도 없고...... 재미 없어."

"하늘아, 가기 싫은 날에 안갈 수는 있어도 안 다닐 수는 없는데, 어쩌지? 생각해 봐. 엄마랑 놀기 싫은 날이 있다고 집에 안 들어오지는 않잖아. 가족은 끊을 수가 없는 거잖아. 학원이라면 끊을 수 있는데, 터전이 학원도 아니고, 가족 같은 거라 끊을 수는 없어. 그런데 가기 싫은 날 미리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빠지는 건 가능해."


선배 아마들의 아이들이 사춘기 때 한 번씩 거쳤던 경험을 미리 전수받아 나는 똑같이 얘기했다.

이 정도 말로 아이도 수긍을 했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러나 터전 다니는 게 재미 없다는데, 억지로 끌려 다니게 할 수도 없었다.

"근데, 어떻게 하면 다시 재밌게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


아이는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른 아마들을 찾아가 고민을 해결할 방법을 의뢰했다.

"OO이랑 매주 떡볶이 먹으러 다녔으니까 그럼 떡볶이 모임 하자고 하자! ㅁㅁ이랑 △△랑... 얘기해 보면 다 좋아할 걸?"


아이들은 이미 3-4년 함께 터전 생활을 해서 친한 아이들이고 자주 마실다니는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아이들 셋을 불러 매주 월요일에 떡볶이 모임을 제안했고, 아이들은 모두 환호하며 '콜'을 외쳤다.

그렇게 다시 아이들만의 '떡볶이 모임'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이제 최연장자 언니였다. 동생들과 매주 떡볶이를 먹으러 다녔다.

아이는 떡볶이 모임 덕분에 무사히 터전 생활 6년을 마쳤고

그렇게 시작된 떡볶이 모임은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 코로나가 오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월요일에 여유롭게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이들은 이미 떡볶이를 먹고 우리집으로 마실을 와 있었다.

어떤 날은 셋만 있는 날도 있었고 어떤 날은 넷, 다섯 아이들이 와 있기도 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까르르 까르르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이는 많은 동생들이 따르는 언니가 되었다.

어떤 날은 아이가 집에 없어도 동생들이 우리 집에 드나들었다.

"딩동."

"언니 없어요?"

"어, 언니 지금 어디 갔는데 조금 있으면 올 거야."

"그럼 저 그냥 쫌 기다릴께요."


아이도 없는데 집에 들어와 그 아이는 나랑 식탁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자 아이들과도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ㅎㅎㅎ


어떤 날은 빌려 간 책을 가져 왔다며 책을 반납(?)하겠다고 들고 와서는 우리 집에서 다른 책을 읽고 가기도 했다. (뭐냐. 우리집 도서관 된 거냐.)


어떤 날은 아직 터전에 다니는 동생들이 우르르 집으로 몰려 오기도 했다.

"딩동."

"언니 언니!!!!!! 이 소식 들었어?"


우르르 들어와서는 앉기가 무섭게 동시다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끌벅적하다.

떡볶이 멤버였던 한 아이가 다친 이야기다. 얼마나 다쳤는지, 얼마나 아플지, 병원에 다녀온 이야기 등등 생생하다. 다음 주 떡볶이 회동은 자기들끼리만 갈 수밖에 없다고. ㅎㅎㅎ


동생들과의 떡볶이 모임 덕분에

우리 집은 이제 아이들마저도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랑방이 되었다.

고학년이 되고 사춘기의 변화가 시작되는데,

단짝 친구는 떠나고,

터전 생활이 재미없던 아이는,

떡볶이 모임 덕분에,

동생들의 맏언니로 남아,

6년 꼬박 채워 끝까지 터전에 다닐 수 있었다.


아이에게 찾아왔던 터전 생활의 위기가

또 다른 선물을 받게 해 주었다.

이렇게 동생들에게 마지막까지 사랑받은

언니는 드물 것이다.


하나의 관계가 끝나면 다른 관계가 열린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엄마인 나는

아이의 문이 닫히고 아이의 관계가 끝나는 것을

지켜보며 기다릴 수 있으면 된다.

그런데 그게 가장 어려웠다. 지금도 어렵다.



함께 찍은 점프샷!


표지 이미지> Image by 709 K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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