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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독립 선언

by 아라

아이가 5학년이 되었습니다.


늦은 퇴근이 예정되어 있던 저는, 아이의 마실을 약속하였습니다.

"오늘 엄마 늦게 오거든. OO네 마실 가는 거 괜찮지? 엄마가 약속해 놓을게."


아이는 마실을 엄청 좋아했거든요. 이제까지대로라면 아이가 신나 하면서 오케이를 해야 하는데, 이 날은 아이가 반항(?)을 합니다.


"아니야. 나 그냥 집으로 올 거야."

"응? 그러면 저녁은 어떻게 하려고? 너 아직 혼자 밥해 먹을 수가 없잖아."

"그냥 알아서 할게."

"그럼 엄마만 마실 가야겠네? 엄마는 퇴근하고 OO네 마실갈 거니까 그럼 넌 집에 있어!"


아이가 마실을 거부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마실 때문에 아이와 싸운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아이는 엄마 껌딱지였습니다.

공동육아어린이집은 양육자와 아이가 함께 모임을 하는 날이 많았는데 아이는 4살 때도, 5살 때도 낯선 곳에 가면 제 무릎에만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걱정 마. 지금은 껌딱지라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엄마 떨어져서도 잘 놀게 될 거야. 우리 OO이도 그랬어." 선배 엄마들이 저를 위로해 주는 날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마실을 좋아하는 날이 오더라고요. 그래도 아이는 남의 집 마실보다 우리집 마실을 좋아하기는 했습니다. 홈그라운드와 그 익숙함이 좋은 거였겠죠. 지금 생각하니 아이가 우리집 마실을 좋아했더래서 제가 우리집을 이웃들에 활짝 열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ㅎㅎㅎ 이웃들이, 또 이웃 아이가 지나가다가 집에 들러 벨을 누르고 저-기 열린 베란다 밖에서 저를 부르는데, 집을 치울 시간이 어디 있나요. ㅎㅎㅎ 그래서 집이 어지러워도 할 수 없이 집을 개방하게 되었나 봅니다. ㅎㅎㅎ


초등 저학년 시기는 마실의 황금기였습니다.

아이들도 마실을 너무 좋아하고 저도 마실이 너무 좋았습니다. 일찍 퇴근하는 날은 이집 저집 모여 와글와글 밥 먹는 게 좋았습니다. 늦게 퇴근하는 날은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아이들 저녁 먹여 놓고 나면 아이들끼리 너무 잘 노는 게 보기 좋았습니다. 잘 노는 아이들 덕분에 엄마들은 또 '어른의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주말이면 본격적으로 놀았죠. 아예 가족 단위로 모여 격주로 캠핑을 다니고 격주로 나들이며 공동육아 행사를 치렀으니 주말마다 어울렸던 것 같습니다. 월요일마다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와 출근을 해도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마실을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혼자 있겠다고 합니다.


아놔. 그럼 밥은 어떡하냐고요. 저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밥' 문제였습니다.

저는 밥 때를 놓치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급기야 저도 모르게 화를 냈던 사람입니다(지금은 그 단계로 가기 전에 대체로 밥을 먹습니다. 밥을 못 먹으면 몰래 다른 거라도 먹습니다). 남편은 제가 화를 내면 일단 '밥'부터 먹이는 게 상책이라고 말합니다. '어? 저기 봐봐. 저 집 맛있겠다'는 말만 해도 제가 방금 전까지 말하던 주제를 잊고 순식간에 밥으로 관심이 전환된다고 하더라고요. 남편 덕분에(?) 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아무리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었다 해도 밥 시간이 되면 "밥 먹고 합시다!"를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에 몰두하면 배 고픈 줄도 모른다는데 그건 남의 얘기입니다. 집중하느라 다른 사람의 말을 놓친 적은 있어도 배가 안 고팠던 적은 없었습니다. 밥심으로 삽니다. 울다가도 배가 고파지면 밥을 차려 먹습니다. 슬픈 일이 있어도 배는 고프던데요. 그러니 아이의 밥이 얼마나 중요했을까요.

이제부터 아이가 스스로의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참나. 초등학교 2학년까지도 엄마가 음식 쓰레기 버리러 5분 나가는 데도 졸졸 따라왔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안 따라나온 거지? 그러고 보니 많이 컸다, 싶어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집 한 번 비우려면 최소한 열흘 전부터 마실을 계획해야 했는데 이제 아이만 집에 두고 나가면 되다니, 얼마나 편해질까. 만세! 이제 아이와 샴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는 단계가 끝나갑니다!


아이는 마실을 가지 않겠다, 밥은 알아서 먹겠다고 했을 뿐인데, 저에게는 이 말이 아이의 '독립 선언'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런 날을 오매불망 기다려 왔는데 갑자기 아이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 당황했습니다. 당황하는 와중에도 머리 속에는 게임 화면이 떠올랐습니다.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더니 어느 새 저도 모르게 한 단계를 클리어한 상황. 이제 레벨 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어느 새 다음 단계를 시작하라는 'START' 버튼이 깜박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 버튼을 누르고 새로운 미션을 클리어해야 합니다.


육아에 다음 단계가 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습니다. 사춘기에 대한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방문을 잠그는 것은 아이의 권리다 (중략)

아이는 말 대신 행동으로 독립된 시간과 공간을 요구하는 것임을 인지하고 그대로 있게 해 준다. 문을 닫아버렸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말자. 아이는 아무 일 없이 방에 잘 있다. (주1)


책을 읽다가 빵 터졌습니다. 그렇지 그렇지. 아이는 방에 잘 있지.


우리 아이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만 머물 듯, 마치 엄마의 손바닥 안에서만 노닥거리다 초등 사춘기를 보내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발밑에도 내려가 보고 흙 좀 묻힌다고 큰일나지 않습니다. 부모 어깨 위에 올라타서 세상을 다 맛본 것처럼 우쭐거린다고 거만해지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할 아이들입니다. 더욱 거칠어 보이는 세상으로 말이지요. 사춘기 시절 엄마를 이겨보지 않으면, 세상에 나가서도 이겨볼 꿈조차 꾸지 못합니다. (주1)


초등 사춘기 자녀들은 여러분과 소통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들이대기를 원하지요. (중략) 이제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초등 사춘기 자녀와 소통하려 하지 말고, 살짝 떨어져서 ‘바라보기’를 해야 합니다. ‘바라보기’는 이성적 판단이 아닙니다. 직관적 사고입니다. 사춘기 자녀와 갈등이 심하다면, 자꾸 섣부른 소통의 시도를 멈추길 바랍니다. 그리고 시간을 갖고 일단 ‘바라봐주기’ 바랍니다.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소통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시선을 놓지 않으면서 동시에 간섭은 하지 않는 성숙한 존재를 느끼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런 멋진 어른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주2)


저는 이 책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때부터 살짝 손을 놓았습니다.

동료들과 회식도 즐겼고 집에 와 아이와 저녁을 먹은 후에 이웃집에 저 혼자 마실도 자주 갔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놓아 보자, 하고는 저도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습니다.


아이는 저녁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 동안 아이는 혼자 밥 차려 먹는 능력을 습득했고 요리 실력까지 일취월장했습니다.(관련 글 링크 너는 스스로 밥을 해 먹을 줄 알지) 자기 자신에게 밥 차려 대접할 줄 아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아이는 혼자 갖가지 책과 영화를 섭렵했고 해리포터부터 심리학까지 갖가지 주제의 책을 읽었고 최근에는 동물권에 관심이 있어 보입니다. 아이는 책을 즐겨 봅니다. 고3 때도 입시에는 1도 도움되지 않는 독서 모임에 나갔으니 말 다했습니다. 아이는 친구들에게 휩쓸리지 않는 듯 보입니다. 적절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적절하게 혼자 있기도 합니다. 아이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줄 압니다. 어떤 날은 집에 오면 피아노를 치고 있고 어떤 날을 책을 읽고 있고 어떤 날은 맛난 요리를 만들어 두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공동육아의 시간을 지나서 혼자 있는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혼자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엄마인 제가 모르는 경험도, 엄마인 제가 모르는 생각도, 엄마인 제가 모르는 장점도, 엄마인 제가 모르는 성격도 많겠지요. 제가 아이를 다 모릅니다. 제 부모가 저를 다 모르듯이 말입니다.


무어라 잔소리도 하고 싶고 무어라 이래라 저래라도 하고 싶은데, 제가 부모님 말은 안 들었기 때문에 ㅋ 아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잔소리를 하는데 반격 없이 가만히 있더라고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왠일이야? 엄마가 잔소리를 하는데 반박이 없네?"

"엄마도 할머니가 얘기하실 때 그랬다며. 달아달아 밝은달아. 나도 달아달아 밝은달아 몇 번 했어."


헉. 아이가 벌써 배웠습니다. 제가 하던 대로요.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해도 아이는 자기 뜻대로 하겠지요. 자기 뜻대로 하는 아이라서 다행입니다. 저도 제 인생 잘 살고 있으므로 아이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알아서 자기의 길을 잘 가고 있다고요.




주1> 김선호, 《초등사춘기 엄마를 이기는 아이가 세상을 이긴다》, 2017, 길벗.

주2> 김효정 기자, "사춘기 찾아온 초등 자녀, ‘소통’하지 말고 바라보라!", 2017. 10. 29., E동아(https://edu.donga.com)

표지 이미지> Image by Enriqu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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