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고백
아이야.
네가 올해 스무 살이 되었잖아.
한국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스무 살이 되었다는 건 고등학교 3년을 지나왔다는 뜻이지. 대학교 입시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지.
네가 알다시피 엄마는 너에게 성적을 이유로 칭찬이나 비난이나 걱정을 한 적이 없었어. 성적 자체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네가 어느 날 친구가 성적이 떨어져서 부모님께 혼났다는 얘길 듣고는 흥분해서 엄마한테 그랬었잖아.
“엄마, 성적이 떨어졌다고 아이를 혼내는 게 말이 돼? 성적 떨어지면 제일 속상한 사람이 누구겠어? 본인이 제일 속상한데 엄마가 그걸 혼내면 더 속상해지는데 엄마가 혼내면 돼?”
네가 그런 얘길 할 때 엄마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숙제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성실하게 숙제도 하고 공부도 하는 네가 자랑스러웠어.
학교 선생님이 너에게 홀로 다니는 친구를 부탁했을 때도 엄마는 네가 자랑스러웠어.
놀이공원에 가면 문 열기 전에 가서 문 닫을 때까지 놀다 오는 너도 사랑스러웠어.
친구들과 스승의 날, 선생님 선물하겠다고 온종일 쿠키를 굽는 너희들이 사랑스러웠어.
또래 친구들을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고 어울리는 너희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어.
너 같은 아이가 엄마에게 온 것이 복이고 행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은연중에 나는 다른 엄마들과는 다른 ‘좋은 엄마’라며 스스로에게 자아도취 되었어.
그렇게 너는 고3이 되고 스무 살이 되었지.
어렵지 않게 대학에도 합격했고 이제 걱정할 것은 없었어.
그런데 그즈음 우연히 브런치라는 플랫폼에서 ‘엄마의 유산’이라는 글을 읽게 되었어.
‘너희들에게 접종했어야 할 저 광기는 어디에 있는가?’
진짜 널 미치도록 하는 그것이 세상이 네게 부여한 숙제이며 진짜 널 ‘그것’밖에 모르게 하는 ‘그것’을 발현시키는 것이 신이 이 세상에 널 출현시킨 이유이며 진짜 ‘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안되면 안 되는 그것’이 인간으로서 네가 유일하게 해야 할 업이란다.
네 사명, 네 삶의 목적,
네 맑은 영혼에서 들리는 그것이
네 등이 실려야 할 짐이란다. (주1)
이런 대목들을 읽는데 갑자기 가슴이 뛰고 엄마의 20대가 떠올랐어.
아, 나 그땐 해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가고 싶은 나의 길이 있었는데,
“제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하면서.
잠깐만. 엄마가 너에게 꿈꾸는 모습을 보여줬던가?
계속 책을 읽었어.
상상에서 출발한 꿈은 현실이 될 수 있고 꿈은 꿀수록 커지며 꿈이 현실이 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힘은 ‘믿음’이라는 말이 쓰여 있었어. 꿈을 꾸고 이뤄내는 것을 대자연과 온우주가 바라고 있다는, 어쩌면 많이 듣던 말이었어.
‘꿈은 현실이 된다. dreams come true.’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었을 때 매일 듣던 말이었어.
‘온 우주가 너를 응원해.’
수능 선물 세트마다 많이 새겨져 있던 말이었어.
그런데......
자유로운 공기 속에 너를 놓아두었는데,
나들이로, 캠핑으로 하늘을 천장 삼아, 땅을 놀이터 삼아 함께 놀며 함께 자랐는데,
강요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하였는데,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않고 너의 고유성을 발견해 왔는데,
많은 아이들과 여러 어른들과 어울리며 ‘관계’와 공동체를 경험해 왔는데,
미래의 학벌이나 직업에 저당잡혀 현재를 ‘희생’하지 않도록
행복은 ‘지금’에 있는 거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런데 눈물이 나더라고.
그런데 엄마가 놓친 것이 떠오르더라고.
아이야. 엄마는
너에게 미처 알려주지도, 보여주지도 못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닫고 말았어.
그건 바로 ‘꿈’이었어.
엄마는 너에게 꿈꾸는 방법을 알려주지 못했더라고.
아니 그런 건 알려주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아닐 테지.
엄마는 꿈꾸며 사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더라고.
너는 벌써 스무 살인데, 이제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하는데,
어쩌지? 가장 중요한 걸 놓쳤네.
어쩌지? 어쩌지?
너에게 너무 미안했어.
어쩌면 스무 살 무렵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데,
꿈이라는 걸 소개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했어.
그렇게 사는 건 보여 주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어.
책을 덮으면 정신줄이 돌아오긴 했어. ㅎㅎㅎ
너를 믿는 마음이 되살아났지.
스무 살인데 자기 길은 이제 자기가 알아서 가겠지, 하는 믿음.
그동안 엄마는 너를 혼자서 키우지 않았잖아.
엄마가 너무 부족하다는 걸 잘 알았으니까.
아빠와도 함께 키웠고,
공동육아로 많은 아이들 속에서
많은 어른들과 함께 키웠고,
집이 아니라 마을이라는 공간에서 키웠고,
이미 학교라는 사회도 경험했고.
또 그 시간 동안 네가 충실하게 살아온 것도 알지.
무엇보다도 너는 엄마에게 갇혀 있는 아이가 아니지.
엄마가 가르쳐 주지 못했지만
다른 아이들과 어른들을 통해 스스로 배운 것들이 있고
앞으로고 너는 계속 배워 나갈 거고
그러니 엄마의 잔소리 따위 없어도
엄마가 모든 걸 보여주지 못했다 해도
네 길은 네가 찾아갈 거라고 믿는다.
미안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제 세상에서 배우면 되니까.
정신줄을 되찾으니 너는 괜찮겠더라고.
너는 네 길을 알아서 찾아가리라 믿어지더라고.
그렇게 너에 대해 생각이 정리되고 나니까,
결국은 엄마가 문제더라고.
엄마의 꿈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더라고.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려고 나름대로 애써 왔는데,
나름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도 눈물이 났어.
아, 엄마의 꿈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나는 꿈을 어디에서 잃어버린 걸까?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연말에 겪은 일도 영향이 컸어.
12월에 엄마가 너무나 존경하던 분이, 공동육아를 처음 시작하신 분이 돌아가셨거든.
너무 슬펐어. 곁에 계실 때 더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어.
너무 빨리 떠나 버리셨는데,
뭔가 그분이 하셨듯 따라 살아야 할 것만 같은데,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엄마는 그저 해맑게 즐겁게만 살아온 것 같고,
의미 있는 삶에서는 너무 동떨어져 멀리 와 버린 것만 같고 너무 괴로웠거든.
그래서 무언가 간절한 마음이 들었었나 봐.
어쩌면 뻔한 말들로 치부할 수도 있었는데,
엄마에게는 오히려 글 쓰신 분이 매일매일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배운 것을 삶에서 실천하면서 그 정신을 딸,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하는 마음, 그 간절함이 와 닿았던 것 같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일단 새벽에 일찍 일어나 보자!
마침 박사 과정을 마쳤으니 논문을 준비하는 것도 좋겠다!
책을 읽어도 좋을 거야!
책에 늘 답이 있으니.
엄마는 무작정 새벽에 일찍 일어나 책을 읽기 시작했어.
(다음 글에 계속)
주1> 김주원, 엄마의 유산.
주2> 칼 마르크스, 자본론.
글에 들러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새로운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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