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Luminari 露美那里論 — 루미나리즘(露美那里主義)
들국화가 나라면, 행진
세대를 초월한다는 것은 정말로 매력적이다.
수십 년을 예술가로 살며 돈과 명예를 얻는 일은 신이 주신 축복이 아닐까.
이십년도 더 전에 금요일 심야 토크쇼에 전인권 씨가 나왔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음반 장식장에는 들국화의 앨범이 꽂혀 있었고, 여러 번 들어본 친숙한 가수였지만 나는 그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냥 머리가 산처럼 솟은 저항의 아이콘 정도로만 여겼다.
그날 객석은 팬들로 가득했고, 그는 자신의 인생과 노래를 이야기했다.
나는 그저 일개 시청자로서 TV 앞에 앉아 있었다.
검은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남성 팬의 팔뚝 안쪽에는 그 가수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다.
진행자가 문신의 사연을 묻자, 그 남자는 옥에서 고통받는 전인권의 아픔을 함께하고 싶어 가장 여린 살에 그 얼굴을 찔러넣었다고 했다.
아마 대마초 문제로 구속되었던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예술을 한다는 건 어쩔 수 없이 고난을 수반하는 일인가.
값을 치르고 누리는 예술가의 삶 — 그 화려함 뒤에는 여전히 갚지 못한 빚이 있는 걸까?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고뇌하며 보내는 불면의 밤, 우리는 그 대가를 상상해 본 적이 있을까.
그의 노래가 시작되고, 절정을 향해 갈 때 나는 울고 있었다.
주르륵— 대비할 새도 없이 부지불식간이었다.
나는 미술 작품을 보고 숨이 멎은 적도,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울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한 사람의 생이 나를 통과했다.
그 특별한 경험에 대해 지금도 전인권 씨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명인은 관객을 탓하지 않는다.
그는 예술에 깜깜이였던 나를 설득해냈으니까, 진짜 예술가였다.
그리고 그 팬의 말 — “그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 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술은 정말로 아픈 것일까?
골목을 지나가던 할머니가 ‘아리랑’을 부른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리랑은 무슨 뜻일까.
아리고 쓰린 마음을 나타내는 말일까.
어린 시절엔 도통 이해할 수 없던 노래였다.
하지만 이제는 님과 함께 고개를 넘는 사랑과 이별의 한을 상상 속에서 읊조릴 수 있다.
나에게도 한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나의 시절, 영화관 나들이는 특별한 일이었다.
충무로의 전성기, 종로3가에는 세 개의 극장이 있었다.
서울극장, 단성사, 피카디리.
몇 시간이고 줄을 서서 기다리던 그 시절의 풍경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몽글몽글하다.
유독 기억나는 건,
노오랗게 구워 탐스럽게 까놓은 군밤.
맵시 있게 벌어진 틈을 툭 갈라서 커다란 알밤을 꺼내면,
그걸 어떻게 먹을지 한참을 고민하곤 했다.
조금씩 아껴 먹을까, 한입에 넣어 터뜨릴까.
그 고민이 행복이었다.
오늘의 ‘아리랑’은 기억 속의 영화 한 편을 불러왔다.
〈서편제〉.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그 깊은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영화가 끝난 뒤 한참을 가슴이 눌린 듯 답답했다.
한이 있어야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다며,
자신의 딸의 눈을 멀게 만든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판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에 대해 생각했다.
오늘처럼.
‘한’ —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고,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
뜻을 찾아보았더니, 뜻이 정말 한스럽다.
그리고 나는 한이 있다.
한이 있어도 나는 득음을 할 수 없으니 어쩌나.
하지만 나는 글을 쓴다.
있는 줄도 몰랐던 기억과 감정이 밀려 올라와서
그것들이 나를 이끌고 저만치 가는 시간.
젖은 마음을 꺼내 말리듯이,
한 장 한 장 장면을 꺼내 널어 놓는다.
글이 소리와 다른 것은,
한이 풀려야 더 크고 넓게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을 품고 써내려가는 글은 잠시의 공감을 이끌어내도
울부짖는 칼날에 다칠까봐 다시 열지 않게 된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소망한다.
얼른 내 응어리가 풀려서,
아픔도 기쁨도 함께 노래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