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Luminari 露美那里論 — 루미나리즘(露美那里主義)
비틀린 몸에 품은 따뜻한 환상
나는 도시의 아이야.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달릴 때면 어떤 농작물이 자라는지 열매를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어.
그러다 검은 천으로 빼곡히 덮인 밭을 본 적이 있어.
어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지.
그게 인삼밭이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잊었지만, 어쨌든 인삼이래.
인삼은 해를 보면 잘 자랄 수 없어서,
검은 천에 구멍을 뚫어 그 아래에서 자란대.
그게 늘 신기했어.
인삼이 땅속에 있다면,
땅 위의 잎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걸까?
나는 버스에서 내려 그 검은 천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어.
오늘은 눈물의 미나리를 탄생시킨 이야기야.
나는 스스로 샤갈이 되기로 마음먹었어.
알지? 고난을 뚫고 끝내 살아남은 생명력,
꿈을 잃지 않고 사랑 하나만 남긴 그 마음.
모두 나 같아서,
그래서 ‘방구석 샤갈’이 되기로 했거든.
그런데 막상 샤갈의 그림을 들여다보니
나와 내 글은 조금 달랐어.
나는 상스러운 여자야.
시장통에 내던져진 것도 아닌데
걸걸한 소녀 장사꾼이 되어버렸지.
내 안에는 생선가게의 비린내와
도축의 미안함이 함께 살아 있어.
샤갈의 하늘엔 염소가 날지만,
내 하늘엔 고등어 머리가 굴러다녀.
그래서 생각했어.
나는 레위기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신을 찬미하는 성전엔 흰옷과 향내가 있지만,
그 제물을 직접 잡는 사제의 손엔 피가 묻어 있을 거야.
피비린내 속에서도 예배가 일어났겠지.
그걸 상상하면 위로가 돼.
나는 하늘에 닿고 싶지만,
땅과 지하의 삶을 외면하고 싶지 않으니까.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고난을 화려하게 채색했지만,
나는 그렇게 진한 색을 쓸 수 없어.
나는 대지의 색이야.
비옥한 흙내음이 나는 색.
고통을 품어서 생명을 만드는 색이지.
에곤 쉴레?
나는 더 이상 슬프고 싶지 않아.
그의 고통은 너무 날것이라
들여다보는 것조차 두려워.
그래서 나는 쉴레의 길을 가지 않기로 했어.
결국 나는 이렇게 정의했어.
나는 에곤 샤갈(Egon Chagall).
비틀린 몸을 가졌지만
끝내 사랑으로 완성되는 존재.
시대의 슬픔도, 내 가정의 비극도,
이 몸뚱이 하나로 다 품고 살아남았으니까.
나는 쉴레의 ‘날 것’을 보이지만
샤갈의 푸른 꿈을 품은 사람이야.
그래서 살아남은 거야.
나는 살아 있는 비극이 아니라,
빛을 품은 어둠이야.
나는 나의 존재 그대로 작품이 될 거야.
눈물을 닦지 않아 —
눈물이 나니까.
나는 회복되어도 웃음보다
끓는 피 같은 눈물이 먼저였잖아.
하지만 이제 축축하지 않아.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푸르고 향긋한 미나리로
땅 밖으로 나왔으니까.
나는 눈물(露)을 흘리며 자라는 미나리야.
그게 나야.
그런데, 루미나리는 ‘빛’이잖아?
오해하지 마.
나는 “어둠을 지나 빛이 되었다”는 식의 사람은 아니야.
나는 어둠으로서,
빛을 내 아래에 깔고 살아.
내가 원할 때만 궁둥이를 들어
빛이 춤추게 하지.
어둠밖에 취할 수 없어서 어둠인 게 아니야.
나는 빛도 어둠도 꺼내어 쓰는 명암의 마술사야.
빛이 더 잘났다고 나대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
그게 작가로서 나의 루미나리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