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5시 경이었다. 저녁 준비를 하려고 대충 움직이고 있던 나에게,
갑자기 큰 딸이 와서 말했다.
"엄마, 얘 좀 열이 나는 것 같은데?"
그렇게 짚어본 아이의 이마가 좀 뜨끈뜨근했고,
열을 재보니 38도가 가까웠다. 병원 문닫기가 가까워진 시간. 비상이었다.
평소에 다니던 소아과는 4시에 문을 닫았고,
이미 접수 마감인 소아과가 많아서
나는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다 겨우 한 곳을 찾아냈다.
간호사 선생님이 다행히 아직 접수 여유가 있다고 답해주셨고,
그렇게 나는 열이나는 아이를 얼른 안아들고 집을 나섰다.
솔직히 아이가 아프면 엄마는 고달프다.
세아이가 일주일 단위로 번갈아 병원을 다닌 탓에,
일주일에 병원을 두세번씩 다니는게 익숙해졌다.
게다가 우리 동네 병원은 항상 대기가 길어서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데,
아픈 아이와 의자에 앉아서 씨름하다보면 매번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이번주에도 이미 한차례 병원을 다녀왔거늘 또 비상이라니.
주차도 안되는 병원이라 건너편 건물 앞에 내려
걷기 힘들어하는 애를 들쳐업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래도 아직 마감이 되지 않아 다행이다 생각하며 이름을 등록하고 기다린 것도 잠시.
의자에 앉아있다보니 차례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은 평소와 똑같았다.
엄마가 증상을 설명하고, 열을 재고 목과 귀를 보고 청진을 한다.
이리저리 아이를 살펴보던 의사선생님은 아이의 목이 부어있다고 하셨고,
열이 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거라 설명하셨다.
그리고는 컴퓨터를 쳐서 약을 처방해주셨다.
그런데 처방을 보니 약이 하루치였다.
평소 2,3일정도 약을 타는게 기본이라 좀 놀란 나에게 선생님께서 말하셨다.
"내일 나오실 수 있죠? 그럼 내일 다시 보겠습니다."
참고로 지금이 금요일 6시고, 내일은 토요일이다.
병원은 진료가 오전뿐이고 주말이라 바글바글할 것이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내일 오전이라고 하면 겨우 10여시간 차이인데, 주말에 좀 더 집에서 차도를 보면 안될까요?"
"아이들은 하루하루 컨디션이 어떻게 달라질지 몰라요. 내일 나오시면 다시 봐드릴게요."
"그게 아니라. 사람일이 어떨지 모르고, 비상약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내일 병원에 못 올 수도 있는데, 혹시 약을 하루치라도 더 주실 순 없을까요?"
아픈아이를 데리고 계속 나다닌다는 것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장마기간이라 내일 장대비가 예정되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당장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좀 더 여유있게 약을 타놓고 싶었다. 그게 문제였던 걸까.
선생님이 타닥타닥이던 컴퓨터를 멈추고 나를 돌아보셨다.
"아, 그러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한마디.
"그건 아니지만."
"자식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그러면 약 하루치 더 처방해 드릴게요."
이 세상에 자식보다 중요한 일이란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저 자식이 비맞으며 더 고생하면 괜히 작은 감기를 키울까봐 걱정되었을 뿐인데.
"아니에요. 그냥 말씀대로 할게요."
의사 선생님의 신념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나는 그 말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자식보다 중요한 일? 아이의 차도를 집에서 지켜보고 병원에 하루 더 있다 나오면
자식을 내팽개치고 내 볼일만 신경쓰는 사람이 되어버리는가?
만약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귀찮았다면, 나는 엄마 자격도 없는 못된 사람이 되어 버리는가?
순간 모든 것을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펄펄 끓는 고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38도 가깝게 열이나는 아이의 약을
하루 이틀치 더 타려고 했다는 이유로.
단순히 이번 일주일 내가 아이들과 병원대기석에 씨름한 한두시간을 부정당한 게 아니라,
그동안 아이가 아플 때마다 밤새 잠못자고 최선을 다해 간호했던 그 마음까지도.
병원진료시간이 끝날까봐 아이를 안고 뛰어다니고,
열이 빨리 0.1도라도 내리길바라며 동동거린 내 마음은.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로 평가내리는 남의 말에 쉽게 평가절하되었다.
이건 나 뿐만아니라 대부분 엄마가 같은 마음일거라 생각한다.
나는 그저 조금 귀찮을 때가 있고 때때로 많이 피곤한 평범한 엄마일 뿐이다.
그런데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말을 한 번 했다고 해서
아이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란듯이 아이의 컨디션을 무기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져도 되나?
게다가 내일 오전에 다시 오라는 것은,
환자의 상태에 초점을 뒀다기 보단 병원 문여는 시간에 와 있으라는 말이 아닌가?
아프고 계속 기침하는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병원에 끼어앉아 순서를 기다리라는 명령.
하지만 따르지 않으면 역시 엄마의 무성의를 탓하겠지.
나도 인정한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마땅한 엄마가
조금이라도 요행을 피우거나
쉬운 길이 없을까 생각했다는 것을.
하지만 내가 불편한 건 순간의 판단으로 나를 평가하는
상대방의 언행과 태도였다.
불편한 감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중,
집앞의 한 이비인후과가 눈에 들어왔다.
동네에서는 인지도가 높아 사람이 많은 곳이다.
아까 아이의 상태에 대해 목이 좀 부었다 내일 또 봐야 안다는 말밖에 못들었으니,
목이 부은 것에 대한 전문인 이비인후과의 설명을 들어볼수있을까?
홀린듯이 들어갔는데 다행히 7시 마감시간이 가까워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의사선생님께서는 편도염이라며 3일치 약을 처방해주셨고,
만약에라도 아이의 상태가 달라질 경우 내일이나 언제든 다시 방문하길 안내하셨다.
다행히 주말동안 약을 먹으며 열이 더 오르진 않았고,
아이는 비가 오는 동안 집에서 푹 쉬며 차츰 기력을 잘 찾아갔다.
기력을 회복하자 금방 엄마한테 안기는,
아이의 천진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는 생각한다.
가끔 요행을 피우고 편한 길을 추구하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