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커피를 못마셨다.
커피를 마시면 속이 쓰리고 잠도 깊이 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또 늘어난다.
생각보다 커피가 주는 에너지는 큰 기쁨이었던 건지,
최근 종종 우울했던 것도 생각해보면 그 때문 아닌가 싶다.
커피 한 잔에 기대던 그 짧은 휴식과 위로가 사라지니,
하루가 조금 더 무겁게 느껴졌다.
아침의 고요한 시간에 구수한 향이 나는 커피 잔을 손에 쥐고 있던 그 순간.
내 마음도 함께 녹아내리곤 했는데,
이제는 그 온기를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향긋한 허브차 시원한 탄산수 모두 훌륭하지만 커피만한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커피를 마셨을 때 쨍하고 솟아나는 에너지가 그리웠다.
표현하기 어렵지만 뭔가 생기가 도는 느낌.
그 감각이 사라지자 행복도 같이 사그라드는 것 같은 허전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허전함 속에서도 일상은 멈추지 않았고, 해야 할 일들은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너지가 없을 땐 정신력이 아니라 루틴으로 버틴다.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일 수 있는 동작, 고민 없이 손이 가는 순서들.
하루를 억지로 끌고 나가야 하는 순간엔 그런 루틴이야말로 나를 살리는 작은 구조물이다.
이 닦고, 물 끓이고, 밥 짓고, 정리하고, 아이 챙기고, 다시 치우고.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반복 속에서 몸은 일단 움직이고,
그 움직임에 따라 마음도 조금은 따라가곤 했다.
특별하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게 해주는 일상의 뼈대.
그게 바로 루틴이었다.
커피처럼 쨍한 자극은 없지만,
기운이 없을 때도 내가 버틸 수 있도록 긴시간 동안 나를 지켜주는 루틴은 따뜻한 담요 같은 것이다.
하지만 담요는 아늑하면서 조금 답답하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은 그 담요를 살짝 걷고, 바깥의 바람을 느껴보고 싶어진다.
그 순간이 바로 오늘 같은 날이었다.
긴 시간 금기 아닌 금기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오랜만에 컨디션이 괜찮아 콜드브루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역시나. 이래서 디톡스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감탄이 나오는 맛이었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머릿속이 개운하게 맑아지고,
심장으로부터 온 몸에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커피 한 잔에 평소처럼 보이던 아침 풍경이 조금 더 선명하고 활기차게 느껴졌다.
별일 아닌 하루가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지는,
그 사소하지만 강력한 변화.
단지 에너지가 조금 돌았을 뿐인데,
내가 보는 세상도, 내가 말하는 태도도,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도 조금씩 다르게 느껴졌다.
잠깐 잊고 있었던 나의 밝은 면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몸이 조금만 가벼워져도, 마음이 이렇게 밝아질 수 있다는 걸 잊고 살았다.
카페인은 피곤하다는 신호를 일시적으로 차단해준다고 한다.
카페인이 우리 신경에 붙는 아데노신이라는 피로물질을 대체해 버려서
피곤함을 잠시 잊게 해주는 데다,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을 증가시켜 기분이 상승하도록 만들어준다.
생각해보면 커피가 바꾼 건 세상이 아니라 나였다.
평소에는 루틴이 나를 대신해 삶을 붙잡아 주지만,
지나치게 반짝이지는 않지만,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일상의 균형.
이렇게 드물게 에너지가 돌아왔을땐,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찾기 위해
미루었던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왜냐하면 그 순간은 '의무의 시간'이 아니라, '의지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기분 전환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어떤 방향으로 향하고 싶은지 빛을 내는 신호가 된다.
거의 무채색인 날들이 이어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줄기 색이 번쩍 비치는 순간.
해야할 일을 잠시만 미뤄두고 나는 짧은 글을 쓴다. 노래를 흥얼거린다. 나만의 에너지를 발산해본다.
그리고 문득, 다시 느낀다.
‘이런 시간이 참 좋다’는 감정.
에너지가 차오른다는 건 단지 활기나 생산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몸이 가벼워지니 마음은 그보다 더 멀리 가고,
잠깐 잊고 있던 내 안의 색깔들이 천천히 깨어난다.
오늘은 그 색을 꾹꾹 눌러 담지 말고,
조금쯤 흘려보내도 괜찮을 것 같다.
허밍으로, 글로, 혹은 나만의 방식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그러나 나에게는 꼭 필요한 표현.
오랜만에 커피를 마시니 너무 좋다.
혼자만의 금기였던 것이 풀리니 기쁨이 두 배가 되고,
역시 지금이 너무 기쁘다.
이 오랜만의 기분을, 충분히 만끽하고 싶다.
커피 한 잔 마셨더니 에너지가 솟아나서 써 본 즉흥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