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계약!
얼마 전부터 쓰레드라는 sns를 시작했다. 과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인스타그램 같은 여러 SNS를 전전하면서 SNS문화가 점점 싫증 나기 시작했다. 광고의 장이 되어버린, 모든 게시물은 상품화되어 있었고, 상품가치로 치자면 고작 내 계정은 아무런 가능성을 찾을 수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먹방이나 여행 같은 콘텐츠는 남들만큼 남다른 의미가 있지 않았다.
낮잠을 잔다는 의미로 딸랑 배게의 사진 하나와 커피를 여유라 칭하는 상투적인 비유 따위는 손발이 오그라지다 못해 쪼그라들며 닳아 없어질 것 같았다. 내 모든 게시물은 상품가치로 하여금 폄훼되고 있다는 생각이 기정사실처럼 강박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문득,
폄훼되고 있다는 건, 폄훼 또한 진행되고 있다는 '활동성'면에서 존재의 끈을 놓고 있지 않다는 뜻 아닌가!
“겨우... ...”
겨우라는 건 “간신히”란 의미의 ‘겨우‘가 아니라, “고작 그 정도”라는 의미의 ‘겨우‘인 까닭에 하릴없이 세상으로부터 밀려나가는 기분이 차올랐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SNS를 유지하는 이유는 아무나 들여다보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SNS는 “아무도”가 아니라 "아무나"가 본성이 아닌가!
셀럽들이 두 개 이상 계정을 운영하는 것도 “아무도”보단 “아무나 “. 그러니까 좀 희화하자면 “누구나”이기 때문이 아닐는지...
셀럽도 뭣도 아닌 나는 단지, 셀럽처럼 영향력 있는 계정을 더 영향력으로 확대시키는 자양분을 뿐이다.
말이 좋아 자양분이지 그냥 퇴비일 뿐!
과연 자양분 역할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더 큰 야망을 욕망할 것인가?
또 하나의 SNS 계정을 생성하고 난 뒤, 복잡 미묘하고, 야리꾸리, 멜랑꼴리한 감정이 대치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나는 왜 관종을 꿈꾸지?
고작 몇 문장과 별 의미 없는 무미건조한 사진.
싫증 난 것이 아니다. 관종이 되기엔 게으른 것이다.